해발고도 1200m의 이란 아자디 스타디움, 섭씨 40도 살인 더위의 카타르 칼리파 스타디움…. 한국 축구 대표팀은 그동안 아시아의 악명 높은 홈구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월드컵 9회 연속 진출을 이뤘다.
그러나 북한 원정은 차원이 다르다. 15일 오후 5시 30분 한국과 북한의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이 열릴 평양 김일성경기장은 베일에 싸인 '원정팀의 무덤'이다. 천연잔디가 아닌 인조잔디 그라운드는 부상 위험이 높고,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5만 관중의 함성도 원정팀 선수들의 심장을 조여온다. 북한은 이곳에서 14년째 '무패 행진'을 기록 중이다. 1990년 10월 남북통일 친선전(1대2 한국 패) 이후 29년 만에 김일성경기장을 찾는 한국 대표팀은 사상 첫 북한 원정 승리를 위해서 '홈 텃세' 관문부터 통과해야 한다.
◇매스게임 열리는 'B급 경기장'
1990년대 평양시체육단 소속 프로선수로 활약하며 김일성경기장에서 수년간 경기를 치렀던 탈북민 A씨는 "김일성경기장은 매스게임(mass game·수많은 군중이 맨손이나 기구를 이용하는 집단 체조 및 율동)을 위해 인조잔디 구장으로 건설됐다"고 말했다. 그는 "대규모 체육 이벤트를 통해 주민을 단결시키고 사상을 고취시켰던 히틀러처럼 김일성도 매스게임을 체제 선전에 적극 활용했다"며 "수천명 인원이 매스게임 연습을 자주 하면 천연잔디는 버텨낼 수 없기 때문에 1970년대 경기장 증·개축 때부터 인조잔디를 깔았다"고 했다. 인조잔디 구장의 1년 유지 비용(1000~2000만원)은 천연 잔디(1억원)의 5분의 1 수준으로 저렴하다.
그러나 인조잔디 구장은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본선을 개최할 수 없는 'B급 경기장'이다. 인조잔디는 천연잔디보다 마찰력이 높고 탄성이 낮아 발목과 무릎 부상 위험이 높다. 대표팀 주장 손흥민(27·토트넘)은 "함부르크 유스 시절 이후 (8년 만에) 인조잔디에서 처음 뛰는 것 같다"고 했다. 탈북민 A씨는 "한여름엔 인조잔디 아래에 깔린 검은색 고무 알갱이들이 달궈져 발바닥이 뜨거워 경기를 할 수 없을 정도"라며 "김일성경기장에서 태클을 하다 입은 화상 자국이 아직도 양쪽 허벅지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평양엔 능라도 5·1경기장, 양각도 종합경기장 등에 천연잔디가 깔려 있다. 그러나 A씨는 "천연잔디 경기장은 잔디 질이 좋지 않고 곳곳에 잡초도 나 있다"며 "1993년에 김일성경기장의 카펫형 인조잔디를 '고정형'으로 교체해 그나마 경기하기 나은 편"이라고 했다.
◇영국 훌리건 뺨치는 거친 관중
북한 남자 대표팀이 홈구장에서 마지막으로 패한 건 2005년 3월 이란과의 2006 독일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경기(0대2)였다. 당시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관중은 경기장 의자와 물병을 던졌고, 일부는 그라운드와 이란 선수 대기실까지 난입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북한축구협회는 이 사건으로 1600만원 벌금과 함께 일본과의 예선 경기를 제3국에서 무관중으로 치르는 제재를 받았다. 탈북민 A씨는 "북한은 남한처럼 야구·농구·배구 등의 프로 리그가 골고루 발전하지 않아 축구 경기에 목숨을 건다"며 "평양팀이 함경남도 함흥 원정을 가서 거친 경기를 하면 관중석에서 주먹만 한 돌이 날아오는 건 예삿일"이라고 말했다.
2017년 4월 김일성경기장에서 AFC(아시아축구연맹) 여자 아시안컵 예선 경기를 치른 선수들도 관중의 압도적 응원에 혀를 내둘렀다. 지소연(28·첼시 레이디스)은 "응원 열기가 하도 뜨거워 하마터면 집으로 못 돌아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 김정미(현대제철)는 "경기 시작을 앞두고 우리가 '파이팅 하자'고 외치자 그걸 들은 북한 선수들이 '죽이고 나오자'고 맞받아치더라"며 "경기장의 압도적 응원은 오히려 북한 선수들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니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