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전 인천 동구의 한 대형 창고. 아무런 페인트칠도 없는 콘크리트 벽, 격자무늬 창틀, 육중한 기계 공구 틈 속에서 패션 브랜드 빈폴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51년 된 낡은 창고에서는 빈폴의 야심작, '팔구공삼일일(890311)'이 공개됐다. 빈폴의 출시일을 딴 890311은 빈폴이 브랜드 3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하위 브랜드다. 정구호 삼성물산 패션부문 컨설팅 고문은 "청계천 세운상가·을지로를 찾아다니고, 카세트 테이프를 모으는 1990년대생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한국적 헤리티지(heritage·유산)'를 불어 넣은 캐주얼 브랜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주타깃 층은 밀레니얼 세대(1980~ 2000년대 출생 인구)다.
빈폴·헤지스 같은 매스티지(Mass tige) 캐주얼 브랜드들이 달라지고 있다. 매스티지 캐주얼 브랜드는 대중(mass)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prestige) 제품으로 1990~2000년대 인기를 끌었지만, 요즘은 '한물간 추억의 브랜드' 취급을 받고 있다. 명품에 밀리고, 중저가 패스트패션에 치이면서다. 그런 매스티지 캐주얼이 최근 디자인·간판을 바꿔 다는 브랜드 개편, 이색 협업, 신사업 모색 등으로 생존을 위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젊은 감성을 불어넣으며 밀레니얼 세대와 교감하는 브랜드로 변신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밀레니얼 감성' 입는 캐주얼 브랜드
"빈폴은 지난 30년간 큰 사랑을 받았지만, 나이가 든 만큼 브랜드 이미지도 쇠약해졌다." 박철규 삼성물산 패션부문장(부사장)은 이날 빈폴 브랜드 개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생 패션이나 영국 전통 캐주얼 의류를 연상케 하는 면바지와 피케셔츠, 스웨터를 내놓기만 하면 손님이 몰려들었던 시절은 지나간 지 오래라는 얘기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캐주얼 패션 매출은 2년 연속 역신장했다. 승승장구 중인 해외 명품, 패스트패션 부문과는 대조적이다.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싸지도 않고, 비싸지도 않은 '애매한 가격대'가 문제"라며 "캐주얼 브랜드 제품 대부분이 고가 명품 아니면 초저가 상품을 선호하는 요즘 소비 트렌드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자라·H&M·유니클로처럼 더 싸고 감각적인 디자인을 쏟아내는 패스트패션의 인기에 매스티지 캐주얼의 성장세는 더욱 꺾였다.
팔구공삼일일은 빈폴이라는 '소속'만 남기고 모든 걸 바꿨다. 기존 빈폴 제품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가격도 기존 빈폴 제품보다 10~20% 저렴하게 책정했다. 팔구공삼일일은 서구 문화가 한국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한 1960~1970년대 산업화 시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공장 노동자 작업복, 버스·택시기사 유니폼, 중·고등학생 운동복처럼 생긴 제품이 많았다. 미국식 캐주얼과 일본의 복고 패션을 결합해 최근 밀레니얼 세대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아메카지 룩'의 한국 버전이다.
◇화장품·문구류 사업까지
한섬의 타미힐피거는 2년 전부터 젊은 세대를 위한 디자인 차별화에 주력하고 있다. 신발과 잡화로 상품군을 확장하고, 커다란 로고를 새긴 밀레니얼 콘셉트 제품을 전면 배치했다. 코카콜라, 메르세데스 벤츠와도 이색 협업을 진행했다. 이에 올 들어 구매 고객 중 20~30대 비중이 절반까지 올라갔다. LF의 헤지스는 '룰429'라는 남성 화장품을 출시하고, '스페이스H'라는 문화 공간을 만들어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고 있다. 지난달에는 스마트폰 용품과 문구류 24종을 포함한 2030 패션 브랜드 '피즈' 라인 팝업(임시) 스토어를 열기도 했다. 코오롱FnC의 헨리코튼은 지난해부터 인기 제품인 '파일럿 코트'의 온라인 전용 상품인 '파일럿 코트X'를 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