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호찌민 특파원

얼마 전 호찌민 시내 환전소에서 만난 팜 하씨(44)는 "집에 있는 5000달러(약 600만원)를 바꾸러 왔다"며 50만동짜리 두 뭉치와 10만동, 5만동, 5000동 지폐들을 한 움큼 들고 있었다. 베트남 돈으로 1억2000만동가량이었다. 그는 "지폐가 너무 많아 집에 갈 때 잃어버릴까 봐 불안하다"고 했다.

베트남 화폐는 '동(銅·VND)'이고, 1만동이 우리 돈으로 약 500원이다. 화폐의 액면 단위가 어마어마한 셈이다. 더구나 동전 없이 200동부터 50만동짜리까지 지폐만 11종인데, 모두 앞면에 국부(國父) 호찌민 초상이 새겨져 있어 외국인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사진〉. 공항 입국장에선 달러를 환전한 외국인들이 여러 종류 지폐 수십 장을 손에 쥐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돈을 구별하며 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외국인들이 택시나 식당 등에서 거스름돈을 너무 적게 받은 것을 나중에야 알고 황당해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한국 관광객 사이에선 '베트남 화폐 액면가에서 0을 하나 지우고 2로 나누면 한화로 계산된다'는 공식이 퍼져 있다.

현지인들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식당이나 카페 메뉴판에서 마지막 1000단위를 생략하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50'으로 표기하면 '5만동'인 셈이다. 베트남에선 신용카드 보급률(8%)이 낮아 현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분실 위험도 크다. 백화점이나 골프장 등에선 지폐 수백만 동을 잔뜩 갖고 오는 경우가 많다. 1985년 과도한 가계 현금 보유를 막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물가가 600~700%대로 폭등하는 등 후유증으로 화폐 단위가 커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화폐단위 변경)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베트남 정부는 화폐 개혁 단계를 뛰어넘어 곧장 '캐시리스(cashless)' 즉 '현금 없는 사회'로 넘어가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카드와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결제가 소비 진작과 거래 투명화뿐 아니라 너무 단위가 큰 화폐로 인한 불편도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 현지 언론 브이엔익스프레스는 "정부가 내년 말까지 현금 결제 비율을 10%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전기·수도·통신 요금도 비현금 결제를 장려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들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현금 대신 전자 결제가 늘어나는 추세다. 베트남은 3년 전만 해도 전체 거래의 90%가 현금 결제인 나라였다. 올해는 전자 결제 건수가 전체 거래의 19% 정도를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 모모페이, 에어페이, 잘로페이 등 28종의 전자 결제 시스템을 택시, 마트, 식당 등에서 사용할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처럼 온종일 현금 없이 스마트폰만 갖고 다녀도 크게 불편한 게 없다. 호찌민시 다카오 지역의 쌀국수를 파는 길거리 상점 중엔 각종 전자 결제가 가능하다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곳도 많다. 한 카페에서 만난 회사원 23세 응우옌 프엉씨는 "작년부터 스마트폰 페이 앱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젠 하루에 1~2번은 쓴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 계획대로 현금 없는 사회가 빠르게 정착하기엔 난관도 크다. 여전히 현금 선호 비중이 높고, 성인 인구 중 은행 계좌 보유 비중은 30% 수준에 머물러 있다. 40대 팜 롱씨는 "젊은 사람들은 스마트폰 결제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지만 중·장년층까지 파급되기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