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전국 명산에 혈침(穴針)을 박았다는 '풍수침략설'이 한때 유행했다. 정기가 모인다는 '혈자리'에 쇠말뚝을 박아 땅의 맥을 끊으려 했다는 것이다. 풍수침략설은 한 일본 장군이 전범 판결로 처형 직전 남겼다는 유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조선 땅 전역에 쇠말뚝을 365개 박고 수탈한 보물을 숨겨뒀다'는 설이다.
▶한 민간단체는 1985년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며 북한산 백운대에서 1m가량 쇠말뚝 20여개를 뽑아내고 그중 일부는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그런데 이 쇠말뚝은 '등산로 보수용'이라는 설명도 있다. 1927년 11월 12일 자 한 신문은 "백운대 오르는 길에 쇠줄을 둘러놓아 아기네도 능히 오를 수 있게 되었다"고 썼다. 1995년엔 정부가 쇠말뚝 제거에 나서면서 전국 각지에서 쇠말뚝이 대거 뽑혔다.
▶이 쇠말뚝들은 '토지측량용'일 가능성도 크다고 한다. 쇠말뚝이 발견된 지점을 보면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삼각측량'을 위해 표시목으로 박은 위치와 대부분 일치한다는 것이다. 1995년 10월 시사잡지엔 "측량을 위해 산 정상 등에 삼각점을 설치했다"는 당시 측량 기사의 증언이 나온다.
▶이번엔 서울시 보도자료에 풍수단맥설(風水斷脈說)이 등장했다. 서울시는 창덕궁~원남동 사거리를 잇는 율곡로 확장 공사를 9년 만에 끝내고 개통한 30일 자료를 내고 "율곡로는 일제가 민족혼 말살 정책에 따라 종묘~창경궁을 단절시키기 위해 만든 도로"라고 했다. 도로 하나가 '민족혼'을 말살했다는 것이다. 전임 시장이 추진하던 이 공사를 2013년 박원순 시장이 대폭 변경할 때도 서울시는 '민족혼 말살'을 내세웠다. 이 바람에 당초 계획보다 1.5m 깊은 곳에 도로를 내고 공법까지 바뀌었다. 공사비는 854억원으로 배가량 불어났고 완공 시점도 2015년에서 4년 늘어났다. 21세기에 풍수지리가 시민 세금 400억원을 집어삼켰다.
▶문화재청은 작년 서울 덕수궁 뒤편 미 대사관저와 선원전 터를 잇는 120m '고종(高宗)의 길'을 냈다. 고종이 1896년 아관파천 때 이용한 길을 복원한다고 하면서 1952년에 누가 만든 것인지도 불분명한 지도를 근거로 고종의 길을 만들었다. 공사 끝난 지 1년 넘었지만 '있지도 않던 길'이라는 비판이 여전하다. 정부는 국민 세금을 가벼이 여기고, 서울시는 시민 세금에 들어 있는 땀을 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