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리건주(州) 포틀랜드 힐턴 호텔에 들어서자 '텍사스의 잠옷 입은 법정'이란 표지가 보였다. 지난달 열린 이번 행사는 미국 법률서비스공단(LSC)이 개최한 기술 혁신 콘퍼런스다. 딱딱하고 고루하게 여겨지는 법과 혁신의 만남이라니, 어색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신성한 법정에 잠옷을 입고 입장한다는 세션 제목은 더더욱 이해가 안 됐다. 강연에 나선 벤 화이트는 자신을 "텍사스주 콜린(Collin) 카운티의 IT(정보기술) 담당자"라고 소개했다. '법조인이 아니네?' 의아함은 더 커졌다. "법원에서 분쟁을 해결하면 돈이 정말 많이 듭니다. 변호사도 선임해야 하고 법원에 가느라고 일을 쉬어야 할 때도 있지요. 침대에 누워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면 참 편하겠지요?"
IT 시대가 왔건만 법 세상만큼은 100년 전에 비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일반인에게 변호사 선임은 여전히 막막하고, 법원은 겁나고, 법률 용어는 암호 수준이다. 하지만 이른바 리걸테크(법과 IT의 결합)가 미국·유럽 등에서 확산하면서 수백년 동안 변하지 않은 법조계에도 변혁을 불러오는 중이다. 지난해 3분기까지 전 세계 리걸테크 분야의 투자금은 약 12억달러(약 1조4100억원, 법률 정보 서비스 '리걸사이트' 집계)로 전년 전체 투자금(10억달러)을 크게 앞질렀다. 20년 전 이 행사가 시작됐을 때 32명이 모였지만 이번 행사엔 약 600명이 참가했다.
◇"왜 법조계만 아직 구닥다리인가"
이날 '잠옷 입은 법정' 세션엔 텍사스주 콜린 카운티에서 참석한 IT 전문가와 판사·변호사가 함께 올라왔다. 인구 약 100만명인 콜린 카운티에선 소송 가액 1만달러 이하는 온라인으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하고 있다. 연사로 나선 찰스 척 루켈 판사는 말했다. "콜린 카운티는 매년 민사 사건 약 2만개를 담당합니다. 법원은 늘 북적이지요. 두 달 전에 우리는 온라인 분쟁 조정 시스템을 도입해서 분쟁을 원격으로, 즉 잠옷을 입고도 해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텍사스주는 온라인으로 소송을 제기하면 판결은 판사가 내린다. 변호사는 필요 없다. 미국 내 17주가 '온라인 분쟁 조정(ODR)'이라 불리는 이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
콜린 카운티의 ODR은 아주 초보적인 단계의 리걸테크다. 하지만 3일 동안 열린 콘퍼런스에선 IT가 미래 기술을 어떻게 바꿔놓을지에 대한, 그 미래의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가장 놀란 점은 너무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법조 서비스의 개선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양복에 구두를 신은 법조인들이 바글대리라고 상상했지만 스타트업 투자자나 IT 전문가, 프로그래머들도 강연장을 누비며 법률 서비스를 IT의 힘으로 어떻게 더 개선할지에 대해 머리를 맞댔다. LSC 짐 샌드맨 회장의 기조연설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법조인들은 너무 현실 안주형입니다! IT 전문가들을 불러다가 법의 세상에 불을 한번 지릅시다. 다른 영역은 다 바뀌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아직 구닥다리죠?"
◇AI 판사에게 판결받는 세상 '성큼'
'구닥다리'에 머물러온 법을 최첨단 기술로 변신시키려는 노력은 전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우선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의 불편을 줄이려는 노력이 많았다. ODR처럼 소송 절차를 간소화해주는 간단한 리걸테크를 비롯해 그동안 알음알음으로 이뤄져온 변호사 선임을 커플 매칭 비슷한 온라인 추천 서비스로 확대하는 회사들이 늘고 있었다. 미국 로부스(Law Booth), 영국 렉수(Lexoo) 등이 대표적이다. 법률 문서를 변호사 대신 만들고 관리해주는 미국 스타트업 오니트(Onit)·아이서티스(Icertis)가 지난해 각각 2억달러, 1억1500만달러를 투자받는 등 변호사가 하던 일을 대신해주는 IT 서비스도 각광받고 있다.
판례·법전 등을 집어삼키듯 공부해 순식간에 법률적 판단을 내리는 법조 인공지능(AI)도 빠르게 발전 중이다. AI 의사가 수많은 의학 논문과 진단 결과를 학습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듯이 AI 법조인이 변호사·판사의 법 관련 자료 조사를 대신함으로써, 변호나 판결에 활용할 최적의 법을 찾아주는 식이다.
리걸테크가 향한 궁극적인 종착점은 AI가 아예 판단까지 내려주는 이른바 'AI 판사'다. 기계가 인간을 판단한다는 데 대한 윤리적 논란이 많지만,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전관예우 같은 악습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 판사를 보완할 대안으로 거론되며 관련 기술이 빠르게 향상되고 있다고 한다. 공상과학 속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미국 클리블랜드·애리조나·켄터키·알래스카주에선 이미 AI '보조 판사'가 인간 판사에게 초벌 판결을 제안하고 있다. AI 판사는 인간 판사에게 피고의 재범·도주 가능성 등을 예측해 구속 여부 등을 제안한다. 실제로 위스콘신주 등에서 사용중인 판결 프로그램 콤파스(COM PAS)는 피고의 전과, 범죄 내용 등을 분석해 판사에게 "구속이 타당하다"는 식으로 판결을 제안한다. 지난해 에스토니아는 소송 가액이 7000유로(약 907만원) 이하인 비교적 소액 사건의 경우 AI 판사가 아예 판결을 내리도록 했다.
이따금 벌어지는 법조계의 싸움박질을 보고 차라리 AI 판사가 낫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 판사에게 한 사람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타당할까. 배고파서 빵 한 조각을 훔친 '장발장'을 풀어줄 마음 따뜻한 판사가 그리워질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