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는 '람동(Ramdon)'이었다. 영화 '기생충'의 영문 자막을 번역한 달시 파켓은 영화 속 연교(조여정)가 충숙(장혜진)에게 "짜파구리 만들 줄 알아요? 다송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7분 만에 끓여주세요. 한우 채끝살 좀 구워서 올려주고요"라고 말하는 장면 앞에서 꽤 오래 고심해야만 했다. '짜파구리('짜파게티'와 '너구리' 라면을 섞은 것)'라는 단어는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고유명사였다. 영미권과 유럽 관객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고민하다 파켓이 생각해 낸 단어가 바로 '람동'이다. 라면(Ramen)과 우동(Udon)을 합성한 말이다.
'기생충'이 처음 해외에서 개봉했을 때만 해도 이 '람동'은 알아듣기 어려운 한국 특유의 신조어를 외국인에게 적절하게 전달해 낸 좋은 번역의 대표 사례로 꼽혀왔다. 그러나 북미 흥행에 속도가 붙고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까지 따내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적지 않은 외국인은 이제 짜파구리를 우리 발음 그대로 '짜파구리'라고 읽고 'Jjapaguri'라고 쓴다. 영화 속 '외동딸(only Child)'이란 단어도 '외동딸(Oedongddal)'이란 발음 그대로 읽으며 주제곡 '제시카 징글'을 부른다. 번역이란 필터를 통과해야만 도달됐던 우리의 언어와 문화가 '기생충'을 만나며 의외의 반전을 만난 것이다.
◇패러사이트? 기생충이 더 상징적!
외교전문지 '더 디플로맷'은 최근 '기생충, 외국어 그 너머로(Parasite: Moving Beyond 'Foreign')'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영화 '기생충'이 왜 꼭 외국어·영어로 구분돼야 할까?"라고 썼다. 필자 레인 밴던버그는 "영화 제목인 'Parasite'는 본래 한국어로 '기생충(Gisaengchung)'이라고 읽는다. 한국 제목은 '기생하다'라는 뜻과 '벌레'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다. 영미판 제목인 'Parasite'보다 더 많은 함의를 갖는다. '기생충'이란 제목이 영화에 더 걸맞은 이유"라고 썼다. 낯설고 발음하기 쉽진 않지만, 번역된 말보다 더 정확하게 영화 내용을 반영하는 제목이 바로 '기생충(Gisaengchung)'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 기택(송강호)이 "서울대 문서위조학과가 있으면 수석 합격감"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영미판 자막에서 조금 다르게 번안됐었다. 서울대를 모를 수 있는 해외 관객을 위해 서울대가 옥스퍼드 대학으로 바뀌었던 것. 그러나 최근 해외 네티즌들은 이 장면조차 이젠 '서울대(Seouldae)'라는 원래 발음을 찾아서 부른다. 영어식 표현(Seoul National University)이 아닌 그냥 서울대다.
'제시카 징글'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라는 영화 속 노래도 본래 영어 번역은 'Jessica onlychild Illinois Chicago'지만, 요즘 트위터에선 한국 발음 그대로 부르는 것이 더 유행이다. 호주 시드니에 산다는 험버트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발음 그대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영상을 찍어 올리면서 이렇게 썼다. "'과선배는 김진모', 이 부분이 젤 힘들었어!"
◇준호봉 아닌 봉준호
지난 9일(현지 시각)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발표했던 스파이크 리 감독은 "봉준호"라고 정확한 우리식 이름을 또박또박 외쳤다. 한국 이름을 외국에서 부를 때 이름 먼저 쓰고 성을 나중에 부르는 미국식 표기를 할리우드 주요 매체나 배우·감독들이 안 쓰게 된 것도 '기생충' 이후 변화다. '준호 봉'이나 '강호 송' 대신, 봉준호와 송강호로 부르게 된 것이다. 북미 배급사 네온(NEON)과 CJ ENM 영화사업본부 해외배급팀이 우리식 발음 그대로 홍보한 결과다. CJ ENM 측은 "자막부터 이렇게 표기했다. 봉 감독의 의지였다"고 했다. 영화의 힘이 1인치 언어 장벽을 넘다 못해 문화 흐름마저 역전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