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메헝의 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 단지에 지난달 16일 들어서자 큰길을 두고 양옆으로 건물이 있었다. 한쪽은 연구소, 건너편은 나무로 된 돔 모양 전시관이다. 전시관 입구엔 이렇게 적혔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CERN의 설립 목표다. 전시관엔 각종 연구 때 사용됐던 기계와 당시 논문, 연구 결과 모형 등이 전시돼 있었다. CERN은 세계 최대 입자 물리학 연구소다. 세계 각국의 최고 수준 과학자들이 모여 우주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물질을 찾아내고 이 물질이 세상을 구성하는 법칙을 알아내고자 연구에 매진한다. 과학자들이 각자 연구한 결과를 쉽게 주고받으려고 인터넷의 근간이 된 '월드와이드웹(WWW)'을 1989년 개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CERN이 2011년부터 'CERN의 예술(Arts at CERN)'이란 문화 예술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첨단 물리학 연구소는 왜 예술에 손을 내밀었을까. 또 이를 통해 어떤 예술이 만들어질까. 큐레이터를 꿈꾸는 나는 호기심을 안고 스위스로 향했다.
CERN이 예술과 만들어가는 '교집합'의 중심엔 2011년 제정한 '콜라이드(Collide·충돌) 국제상'이 있다. CERN은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의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 거대한 원형 터널을 만들어 입자를 충돌시키는 방법을 쓴다. 상(賞) 이름 '콜라이드'가 거기서 유래했다. 예술과 물리학 사이의 충돌이란 뜻도 담았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모니카 벨로 CERN 수석 큐레이터는 "선정된 예술가들은 상금 1만5000스위스프랑(약 1800만원)과 함께 두 달 동안 CERN에 머물며 과학자들과 교류할 자격 및 일체의 경비를 지원받는다. CERN의 실험을 참관하고 데이터를 공유하며 영감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CERN이 예술가를 초청하는 이유는 일반 대중이 과학에 더 흥미를 가질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한편으론 평소 만나기 어려운 과학자·예술가와의 교류를 통해 양쪽 모두 발상을 전환할 기회를 부여하려는 의도도 있다. 선발된 예술가들이 내놓은 결과물은 우주와 물리학의 신비를 예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국 작가 김윤철은 지구에 진입하는 우주선(宇宙線·우주로부터 대기에 진입하는 고에너지 입자)이 포착될 때마다 물이 작은 폭포처럼 흐르도록 한 설치 미술 작품 '폭포(Cascade)'를 제작했다. 영국 작가 수전 트라이스터는 입자 가속기에서 영감을 얻은 '예술사의 홀로그램 우주 이론'란 비디오 아트를 만들었다. CERN의 가속기 안에서 입자들은 빛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곤 하는데 그 아련한 속도감을 비디오 아트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영국 리버풀·바르셀로나 등의 현대 미술관에서 전시된다.
한국적인 고정관념으로 생각하면 이과와 예능은 정말 멀리 떨어진 듯 보인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이 그림을 그리고 작곡하고 시까지 쓰는 시대에 예술과 과학·기술의 경계는 점점 무너지는 것 아닐까. 201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AI가 그린 초상화가 약 5억원에 낙찰된 일도 있었듯 말이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벨로 큐레이터는 웃으며 말했다. "인류는 무엇이며 우리 인류는 왜 이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가. 이 풀리지 않을 질문을 안고 산다는 면에서 과학자와 예술가는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자면 이거 아닐까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