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서머싯에 있는 패션 브랜드 멀버리 생산 공장에선 조금 색다른 가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포토벨로 토트(Portobello Tote)'란 이름의 이 가방엔 흔한 가죽 장식도, 금속 단추도 없다. 유일하게 사용되는 가죽은 축산물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곡물가죽 같은 부산물로 만든 것이다. 박음질 과정엔 풀이나 접착제를 안 쓴다. 재활용 폴리에스터 섬유로 만든 실을 사용했다. 완성된 가방은 모양이 장바구니와 비슷했다. 디자인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가볍고 튼튼했다. 다 만들어진 가방은 잡지 네 권을 담아도 공간이 남았다. 공장 책임자 피터 카버는 "최대한 단순하게 제작해 아름다움을 살리면서도 가방에 들어가는 자원을 최소화했다"고 했다.

지난 13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됐던 런던패션위크 전시관에 멀버리 포토벨로 토트백이 전시되고 있다. 이 가방은 최소한의 자원만을 사용했고, 식품 부산물로 만든 가죽, 재활용 섬유를 이용한 실 등을 이용해 제작됐다.
지난 13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됐던 런던패션위크에서 멀버리 재봉틀을 이용해 직원이 포토벨로 토트백을 만들고 있다.

패션 산업은 환경오염 주범이다. 매년 의류와 신발이 6000만t 넘게 만들어지지만 이 중 70%는 제 주인을 만나지도 못한 채 쓰레기 매립장으로 간다. 생산 과정에서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 10% 가까이를 배출한다. 항공과 해운 산업 배출량을 합한 것보다도 높다.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는 나는 강의실과 재봉실에 쌓여 있는 수많은 양의 원단 쓰레기를 매일 마주한다. 옷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원단과 가죽, 가봉품 등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런데도 패션업계는 패스트푸드처럼 시시각각 유행에 맞춰 '새 옷'을 쏟아낸다. 환경과 패션이 공존할 방법은 없을까. 그 해답을 영국의 '지속 가능한 패션(Sustainable Fashion)' 열풍에서 찾았다.

◇버려지는 물건이 패션 제품으로 재탄생

'지속 가능한 패션'이란 의류의 생산과 공정, 소비와 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환경을 고려해 오염과 자원 낭비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고, 공정 과정에서 의류 쓰레기를 최소화하며, 재사용·재활용을 통해 오래 제품을 쓴다.

지난달 영국 런던 패션 브랜드 '래번' 매장에서 김정후 탐험대원이 폐낙하산을 재활용해 만든 점퍼를 구경하고 있다.

그냥 폐품을 재활용하는 차원이 아니다. 창의성과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환경을 위해 버려지는 물건을 어떻게 사용할지 계속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엘비스 앤드 크레세'는 버려지는 소방 호스, 가죽 조각 등 15가지 쓰레기를 활용해 가방과 지갑을 만든다. 고무 재질에 섬유를 섞어 만든 튼튼한 소방 호스는 25년이 지나면 화재 현장에서 '은퇴'한다. 하지만 가방 재료로선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하다. 폐낙하산은 가방의 안감으로, 버려질 뻔한 천은 포장재로, 찻잎을 담았던 차 포대는 상표로 변신한다. 창업자 크레세 웨슬링은 "과거에 재사용, 재활용하지 못했던 여러 물건을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했다.

버려진 전자기기가 액세서리로 부활하기도 한다. 2017년 문을 연 영국 액세서리 브랜드 라일리스(Lylie's)는 전자 폐기물에서 금을 긁어내 액세서리를 만든다. 라일리스는 낡은 전자기기에서 금을 '채굴'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창업자 일라이자 월터는 "전자회로를 갈기갈기 찢어 추출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금을 '채굴'한다"고 했다.

◇"멋 낼 때도 지구를 생각하자" 확산

지속 가능한 패션의 중심엔 세계 최고 패션 학교인 런던예술대학(LCF)의 '지속 가능한 패션 센터(CSF)'가 있다. 2008년 설립됐다. 패션 기업과 협력해 지속 가능한 패션 관련 연구와 교육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개발한다. 예를 들어 스웨덴 '패스트패션'의 선두 주자 H&M과 협력해 재활용 옷으로 의류설치물을 만드는 '잘 사는 옷'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식이다. LCF 학생들은 1학년 때 지속 가능한 패션 철학을 배우는 '더 나은 삶(Better Lives)' 수업을 필수로 수강해야 한다.

지난해 9월 홍콩에서 열린 지속 가능 패션디자인 대회 '리드레스 디자인 어워드'에서 1등을 한 영국 매디 윌리엄의 옷을 입은 모델이 해안가를 걷고 있다. 이 옷은 팔리지 않는 재고품과 의류 쓰레기를 재활용해 만들었다. 제작 과정에서 의류 쓰레기가 전혀 배출되지 않는 '제로 웨이스트' 옷이다.

패션과 환경의 융합은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몇 년간 한철만 입고 버리는 저가(低價) 의류를 대량생산하는 '패스트패션' 확산에 대한 반작용으로, 멋 낼 때도 지구를 좀 생각하자는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커지는 중이다. 홍콩에 본부를 둔 비영리단체 리드레스는 2011년부터 지속 가능 패션 디자인 대회인 리드레스 디자인 대회를 열고 있다. 지난해 대회에선 팔리지 않은 옷, 중고 옷 등을 재활용해 의류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제로 웨이스트' 의류를 제작한 영국 매디 윌리엄스가 1등을 차지했다. H&M은 '중고 의류 재판매 서비스'에 이어 지난해 11월부터 의류 임대 서비스를 시작했다. 미국 패션 기업 '랠프 로런'은 버려진 페트병을 재활용한 소재로 제작한 '지구 폴로' 셔츠를 출시했다. 2025년까지 페트병 1억7000만개를 거둬가 셔츠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한국 현대자동차는 폐기 자동차의 가죽 시트를 재활용해 의상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