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구의 5%는 장애인이다.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얼마나 친절할까. 선진국일수록 소수자인 장애인이 다른 이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온 사회가 법·제도·문화를 통해 힘을 모은다. 본지 100주년 프로젝트인 '청년 미래탐험대 100'에 대원으로 참가한 시각장애인 대학생 한혜경씨, 언어학 전공자로 수화(手話)에 관심 많은 김재원씨가 호주·미국 사회가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을 보고 왔다.

저의 버킷리스트엔 서핑이 들어 있습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소망 아니냐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꺼내면 깜짝 놀라는 이가 많습니다. 제가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라서입니다.

서핑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즐기고 싶다고 할 때 저를 종종 막아섭니다. 어릴 때 미국에서 익힌 승마를 다시 배우려고 한국의 한 강습장에 문의했을 때 돌아온 답은 '곤란하다'였습니다. 놀이공원(에버랜드)에서 롤러코스터를 즐길 수도 없습니다. '적정한 시력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입니다. 장애인의 즐길 권리에 대해 많이 고민하던 저는 호주·미국 등에서 장애인 서핑 대회가 열린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꽤 유명한 시각장애인 서퍼도 여럿 있었습니다. '혹시 나도?' 궁금한 마음에 호주 장애인 서퍼협회에 문의 메일을 보냈습니다. 바로 답이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우리가 가르쳐줄게요.' 설렘을 안고 지난달 호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국제서핑협회 장애인 서핑 대회에서 2018년 은메달을 딴 시각장애인 서퍼 링 파이씨가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샌디에이고 부근에서 파도타기를 즐기고 있다.

시각장애인 서핑은 호주에서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호주 출신 맷 폼스톤(Formston), 브라질 출신인 데레크 하벨루(Rabelo) 같은 세계적인 장애인 서퍼들은 파도가 근사한 호주에서 일상처럼 서핑을 즐깁니다. 호주 출신의 폼스톤이 강연한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눈이 안 보이면 파도의 본질을 더 잘 느낄 수 있어요. 파도는 '움직이는 물'이 아니에요. '물을 따라 움직이는 에너지'입니다. 귀와 발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으로 그 존재를 선명히 감지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못 믿겠다고요? 눈 감고 파도를 타보십시오. 새 세상이 열릴 겁니다."

(시각만 제외한) 모든 감각으로 파도를 느껴주겠다! 이런 결심은 아쉽게도 몇 날이고 호주에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접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허탕만 쳤다는 기분은 들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레저 시설을 돌아다니며, 장애인의 즐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호주인들이 노력하는 모습을 체험할 수 있었거든요. 호주 동물원 '와일드라이프 주'에 갔을 때였습니다. 그곳 직원은 동물 생김새를 최선을 다해 설명해주겠다며 저와 동행했습니다. 커다란 새에게 손으로 모이를 주도록 배려했고(부리가 나무 표면 같았어요) 떨어진 깃털을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새 울음소리가 궁금하다고 하자 유튜브를 뒤져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혼자서 맥도널드에 갔을 땐 직원이 메뉴를 전부 읽어주었습니다. 줄이 긴 듯해 "치킨 들어간 메뉴면 돼요"라고 했지만 직원은 말했습니다. "노(No). 당신에겐 우리 메뉴를 모두 안 다음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지난달 호주 시드니의 동물원을 찾아 캥거루를 만져보는 한혜경씨.

한국을 여행하며 겪었던 기억과는 좀 달랐습니다. 저는 여행지 레저 시설에서 위험하다며 이용을 거부당한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제주 우도로 가는 배 안에선 안내견을 가리키며 차 싣는 곳에 타라고 몰아낸 이도 있었지요. 이처럼 장애인들은 한국 관광지에서 자주 차별에 노출됩니다. 반면 호주인들은 장애인도 똑같이 여행하고 즐길 권리가 있음을 익힌 듯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장애인과 어울리는 일이 한국보다 많아 '더불어 살기'를 자연스럽게 배운 까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장애인 중엔 6분의 1 정도만 일반 학급에서 공부하지만 호주는 86%가 일반 학생과 섞여 학습합니다. 호주 퀸즐랜드주(州) 퍼니그로브 공립학교 교장은 "정부는 장애인·비장애인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모든 시설과 인력을 지원한다"고 하더군요.

사람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인생을 즐겁게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도 방식만 달리하면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화장을 하고, 당구를 치고, 보드게임을 즐기고, 노래방에서 흥겹게 노래하고 춤출 수 있습니다. 서핑도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서핑을 해?"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시각은 오감(五感) 중 하나의 감각일 뿐인 걸요.

다가오는 3월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장애인 서핑 대회가 열립니다. 폼스톤을 비롯해 2018년에 이 대회에 참가했던 첫 시각장애인 여성 프로 서퍼 링 파이(캐나다) 등이 다시 멋진 파도를 가르겠지요. 폼스톤은 호주에서 서핑할 기회를 놓친 저에게 "언제든 오면 (서핑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습니다. 저의 버킷리스트가 한 줄 짧아질 날이 머지않아 들뜹니다. "당신은 얼마만큼의 큰 파도까지 탈 수 있는가"란 한 인터뷰 질문에 대한 그의 답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내 능력과 상관없어. 그건 앞으로 얼마만큼 큰 파도를 만날지에 달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