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수많은 사람이 집 안에 갇혔다. 4월이 되면서 상황은 더 나빠질 전망이다. 꽃가루가 가장 많이 날리는 시기를 맞아 재채기와 콧물을 달고 사는 알레르기 환자들은 집 밖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꽃가루만 탓할 수는 없다. 꽃가루는 과일과 곡식으로 자라나 인간을 먹여 살릴 뿐 아니라, 석유를 찾고 범인을 추적하는 데 활용된다. 꽃가루가 코로나 백신을 담는 용기가 될 수도 있다는 한국인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나왔다. 꽃가루는 병도 주지만 그보다 더 많은 약을 주는 고마운 존재다.

꽃가루로 약물 캡슐 만들어

꽃가루는 식물의 정자를 품고 있다. 암술로 가서 꽃가루관을 내밀어 정자를 전달한다. 소중한 생식세포를 보관하고 있는 만큼 혹독한 환경에도 견딜 수 있다. 수십만, 수백만년 된 꽃가루도 내부 세포가 온전할 정도다. 과학자들이 꽃가루를 '식물의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깥쪽 외막을 이루는 스포로폴레닌 성분이 핵심이다.

싱가포르 난양공대의 한국인 과학자 조남준 교수는 지난 1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식물의 생식 과정을 모방해 꽃가루 입자를 원하는 대로 성질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번 논문에는 난양공대 총장인 수브라 수레시 교수와 송하준 교수도 공동 교신저자로 참여했다.

꽃가루는 수분이 없으면 입자를 단단히 조여 견디다가 암술에 가서 수분을 만나면 입자를 열고 정자를 내보낸다. 연구진은 이 과정을 모방했다. 꽃가루에 염기성 물질인 수산화칼륨을 처리해 부피를 키우고 말랑말랑한 젤 상태로 만들었다. 반대로 산성도를 높이자 부풀어 오른 꽃가루가 다시 줄어들면서 단단해졌다.

꽃가루의 변화는 당 성분들이 연결된 펙틴에서 일어났다. 꽃가루 내막을 이루는 펙틴에는 탄소와 수소 두 개가 연결된 에스터(COO-)라는 부분이 있는데, 수산화칼륨을 넣으면 이곳이 카르복실산(COOH)으로 바뀌고 펙틴산이 된다. 이를 통해 꽃가루는 막이 부풀어오르고 부드러워진다. 2018년 미국 텍사스공대 연구진이 산과 염기 용액을 이용해 이끼의 씨앗 격인 포자를 부풀리고 내부를 비우는 데 성공했지만 정확한 원리는 밝혀내지 못했다.

연구진은 꽃가루가 부드러운 젤 상태가 되면 상처를 덮는 피복재나 식품포장재, 약물 캡슐 등 다양한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꽃가루가 작은 입자일 때는 호흡기에 들어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만 다른 형태의 소재가 되면 생체 물질이라 인체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인체에 이식하는 전자장치로 쓸 수도 있다"며 "종이 형태로 인체에서 수분을 흡수하면 모양이 바뀌는 일종의 로봇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범죄 수사, 기후 연구에도 활용

꽃가루는 가격도 싸다. 식물은 생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인해전술을 쓰기 때문에 꽃가루의 양이 넘쳐난다. 옥수수 하나의 알갱이가 수백개에 불과하지만 이를 위해 꽃가루를 500만개까지 방출한다. 소나무는 몇 주 만에 꽃가루를 2.2㎏ 생산한다. 플라스틱을 만드는 폴리락틴산(PLA) 원료가 1㎏에 3달러이지만 꽃가루는 0.01달러에 불과하다. 가공 방법만 발전하면 세상에 이렇게 싼 다이아몬드가 없는 셈이다. 조남준 교수는 "꽃가루의 물질 상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머지않아 플라스틱을 대체할 소재가 될 것"이라며 "3D(입체) 프린터의 잉크로 활용하면 더욱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꽃가루는 크기가 0.01~0.2㎜ 정도다. 바늘 끝이 1㎜이니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크기가 작은 입자는 정전기만 있어도 어디든 붙을 수 있다. 옷이고 머리카락이고 다 붙는다. 게다가 꽃가루는 식물에 따라 모양이 다르고 같은 식물이라도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과학자들은 이를 이용해 보지 않은 곳과 시간을 추적한다.

꽃가루 수사 분야의 세계적인 대가인 영국 글로스터셔대의 퍼트리샤 윌트셔 교수는 2005년 용의자의 옷과 차량에 남은 꽃가루만으로 살해된 피해자가 어느 숲, 어느 곳에 어떤 나뭇가지에 덮인 상태로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냈다. 미국 관세국경보호청은 밀수된 마약의 출처를 추적하기 위해 꽃가루 6000종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갖추고 있다. 관세청은 이 데이터를 이용해 종종 살인 사건도 해결한다.

과학자들은 꽃가루 화석을 통해 과거 지구의 기후도 수사한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이상헌 박사는 경기도 지역의 5000~6000년 전 지층에서 지금 제주도나 남해안에 사는 상록성 난대식물의 꽃가루를 발견하고 당시 이 지역이 아열대기후였음을 알아냈다. 식물 화석인 석유를 찾을 때도 꽃가루가 유용하다. 원유가 가장 경제성이 있을 때는 꽃가루 화석이 진노란색을 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