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고가(高價) 브랜드 제품과 관련해 국내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린 단어가 바로 ‘호갱’이다. 우리나라에만 오면 훌쩍 뛰는 가격에 “고객을 호갱(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손님을 낮잡아 이르는 말)으로 안다”는 불만이 폭주하곤 했다. 해외 여행 등을 통해서 현지 시세와 국내가격차를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는데다, ‘직구’ 뿐만 아니라 개별 브랜드의 온라인 시장이 확대되면서 가격을 앉은 자리에서도 확인하는 게 쉬워졌기 때문이다. 5년 전 프랑스 샤넬이 전 세계적으로 10% 넘지 않지 않는 가격차를 유지하겠다고 전격 발표하며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데 이어, 이번엔 영국 유명 패션 브랜드인 멀버리(Mulberry)에서 “전 세계 동일 가격” 정책을 내놓았다. 럭셔리 업계 최초다.
멀버리 CEO 티에리 앙드레타는 23일 본지와 가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개방성과 투명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면서 "소비자들은 전 세계 멀버리 디지털 매장을 포함해 어느 매장에서든서 동일한 가격을 지불하면 된다"고 밝혔다. 멀버리는 셰익스피어가 사랑했다는 '뽕나무' 로고로 잘 알려진 브랜드. 그는 "지난해 11월 스웨덴 패션 브랜드 아크네 스튜디오와 협업을 시작으로 '글로벌 동일 가격 정책'을 시도했던 것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가격 정책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됐다"면서 "내년 50주년을 기념하는 초석으로 삼은 글로벌 가격 책정이 럭셔리 업계의 표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최초로 실현한 브랜드가 된 것이 기쁘다"고 덧붙였다. 현지 소비세 등 각종 세금을 포함해 동일한 가격으로 책정했으며, 멀버리의 상품의 90%에 해당하는 가죽 제품이 대상이다. 영국은 물론 미 LA, 중국 상하이든 같은 가격. 국내에도 이미 적용됐다.
5년전 멀버리 CEO가 된 앙드레타는 프랑스 랑방·이탈리아 모스키노의 총 매니징 디렉터를 비롯해 구찌 그룹에서 성장세 높은 '신흥 럭셔리'로 꼽히던 알렉산더 맥퀸, 스텔라 매카트니, 발렌시아가의 마케팅 디렉터 등을 역임한 적 있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랑방의 마케팅과 세일즈 분야를 총괄하면서 매출을 두배로 끌어올리는 등 '마이더스 손'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난해엔 국내 시장에도 직진출(직접 진출)해 지사를 세우는 등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그는 "과거 같은 가격 차별화 정책은 럭셔리 분야에서 살아남는데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번 정책은 코로나 바이러스 영향으로 전세계적으로 여행이 제한되고 이동이 감소한 것도 한 원인으로 보인다. 앙드레타는 "코로나 감염증으로 해외여행이 줄어들고 있고, 글로벌 오프라인 매장이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면서도 "해외여행을 가지 않아도 안방 디지털 쇼핑이 일상화되는 요즘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선도적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또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람들의 쇼핑 패턴 역시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면서 "단순히 상품을 디지털에서 파는 것이 아닌 디지털 경험 역시 차별화되고 편의성을 높이면서도, 남다른 수준으로 만들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