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뒤에 냄비는 뭐야."
며칠 전 화상(畵像)회의를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기자는 주방에 침실 하나 딸린 작은 월셋집에 산다. 업무 공간은 주방에 놓인 식탁 겸 책상. 뒤로는 싱크대가 있다. 요새는 카메라 화질이 좋아 설거지하고 엎어둔 그릇, 빨간 고무장갑까지 보이는 모양이다. 이후로는 자리가 불편해도 꼭 흰 벽 배경을 찾아 앉는다.
자택 격리 두 달째를 맞는 요즘, 미국 곳곳에서는 많은 인간관계가 화상 채팅으로 이뤄진다. TV 뉴스 앵커와 기자들도 집에서 방송할 정도다. 자연히 남의 집이 어떻게 생겼나 들여다보게 된다. 집집마다 '멋진 배경 찾아 삼만리'가 벌어지는 이유다. 기본은 조용하고, 빛 잘 들고, 벽 배경이 무난한 곳을 찾는 것이다. 두꺼운 책 몇 권, 장식품이 진열된 책장 앞도 인기다. 다른 곳에 걸려 있던 그림을 괜히 떼 와서 걸기도 한다. '있어 보이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같은 유력지까지 어느 배경이 최고의 명당인지 기사를 쓴다. 전문가들은 흰색·남색·베이지색처럼 차분하면서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심플한 벽 배경을 주로 추천한다.
'가상(假像) 배경'도 뜨고 있다. 실제 배경 대신 원하는 사진을 대신 보여주는 것이다. 이용자 3억명을 보유한 최대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zoom)의 핵심 기능 중 하나다. 화려한 뉴욕 대저택의 거실이나 고풍스러운 유명 대학 도서관, 테크 대기업 본사의 세련된 회의실을 배경으로 만들 수 있다. 와이키키 해변, 울창한 숲 한복판도 가능하다. '홈 오피스' 생활에 지친 이들이 환영하는 이유다.
덩달아 바빠진 건 기업들이다. 전 세계 수억명이 활용하는 화상회의 배경을 '공짜 광고판'으로 활용할 수 있어서다. 인테리어 업체들은 자사 로고가 박힌 멋진 저택의 거실들을 고화질 배경으로 제공하고 나섰다. 미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도 뉴스 스튜디오, 기자들의 뉴스룸을 화상회의용 배경으로 내놨다. 월트 디즈니, 니켈로디언 같은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발 빠르게 어린이용 화면을 만들었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도 가상 배경을 적극 활용한다. 최근 화상회의에서 만난 채팅 서비스 스타트업 센드버드(Sendbird)의 김동신 대표는 회사가 직접 제작한 가상의 사무실 배경을 쓰고 있었다. 채광창으로 아늑한 햇살이 들고, 깔끔한 책장 배경에 멋진 그림도 곳곳에 걸려 있다. 회사 로고도 잘 보이게 배치했다. 투자사나 고객사, 사업 파트너를 만날 때 깔끔하고 일관된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실리콘밸리의 기업용 전자결제 서비스 기업 빌닷컴의 정보라 부사장은 요일별로 다른 배경 화면을 쓴다. 월·화·수·목·금 매일 다른 색상에 'Happy Monday (행복한 월요일)'와 같은 문구를 배치한 다섯 배경이다. 화상회의에서 누군가 이런 배경을 쓰면 모두가 자연스럽게 요일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을 더는 효과도 있다.
어린이들도 가상 배경을 좋아한다. 수업도, 친구들과 수다도 작은 창(窓) 속에서 해야 하는 어린이들에게는 배경 화면이 자신의 취향,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구글에서 'zoom backgrounds for kids(어린이를 위한 줌 배경화면)'를 검색하면 다양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기자는 요즘 '남의 집 거실' 가상 배경을 쓰는데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집 정말 좋다'고 감탄한다. 클릭 한 번에 냄비·고무장갑 현실에서 탈출하고 나니 이게 왜 젊은이들에게 인기인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