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과 나이키는 종교 신도급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패션 브랜드다. 희소성 있는 한정판 제품을 출시하거나, 가격 인상 소식이라도 미리 알려지면 매장 앞에는 어김없이 ‘캠핑족’이 등장한다. 행여 물건이 완판될까봐, 밤을 새우면서 매장 문이 열리기 만을 기다리는 열혈 쇼핑객들이다.
캠핑 현장에는 물건을 실제로 착용하려고 하는 소비자(‘실착러’) 뿐 아니라, 새 제품에 웃돈을 얹어 판매하려는 ‘리셀러’(reseller·재판매상),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줄을 대신 서고 있는 중국인 일일 알바생 등 다양한 사람이 몰려든다. 나이키는 아예 ‘줄 서기 알바생’을 거르기 위해 일부 한정판 출시 행사 때마다 특정 나이키 운동화와 의류를 착용한 사람에게만 구입 기회를 부여하기도 한다.
샤넬이나 나이키만큼 많은 인파가 모이지는 않지만, 고급 시계 브랜드 롤렉스 매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희귀 모델을 구하려고 매일 같이 백화점 ‘출근 도장’을 찍거나, 전국 매장 투어에 나서는 애호가·리셀러들이 있다는 것이다.
◇샤테크·슈테크·롤테크, 승자는?
고난의 행군, 쇼핑 전쟁이 끝나고 난 뒤면 이제 온라인 중고거래 마켓이 들썩일 차례다. 리셀러들은 전리품을 하나 둘씩 꺼내놓으며 눈치껏 가격을 제시한다. 공급이 수요를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소장 가치가 있는 한정판, 브랜드 고유 정체성이 드러나는 대표 상품들은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오르며 쏠쏠한 시세 차익이 생긴다.
샤넬 가방을 되팔아 재테크를 한다는 뜻의 ‘샤테크’, 운동화로 수익을 내는 ‘슈테크’, 롤렉스 시계로 돈을 버는 ‘롤테크’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면 샤테크와 슈테크, 롤테크 중 뭐가 더 남는 장사일까. 2020년 5월 '샤넬 오픈런(백화점 문이 열리자마자 매장으로 달려감)' 사태, 2019년 11월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던 'GD×나이키' 래플(raffle·추첨 판매) 대란, 사시사철 시계 애호가의 애를 태우는 롤렉스 인기 모델 수익률을 비교해봤다.
◇나 빼고 다 샤넬 있나…샤테크 수익률 18.2%
샤넬은 14일부터 가격을 최대 26%까지 인상했다. 가장 대표적인 상품인 '샤넬 클래식 플랩백'의 경우, 스몰 사이즈는 632만원에서 769만원(21.7%)으로, 미듐은 715만원에서 846만원(18.3%)으로, 라지는 792만원에서 923만원(16.5%)으로 올랐다. 보이백 미듐 사이즈는 622만원에서 657만원(5.6%)으로 올랐다.
23일 현재 네이버 중고거래 카페 ‘중고나라’와 명품 거래 플랫폼 ‘필웨이’에는 샤넬 클래식 플랩백 미듐(은장)이 최고 820만원에 매물로 나와있다. 라지는 최고 850만원, 보이백 미듐은 630만~647만원에 판매 중이다. 상품 정보란에는 ‘가격 인상 직전 백화점에서 품번, 생산국, 바느질·엠보싱·광택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고 구입한 새 상품’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고가 명품을 구입하는 사람들 중에선 백화점 근처 구둣방이나 상품권 판매소에서 현금을 백화점 상품권으로 바꿔 약 2.8~3% 저렴한 값에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715만원짜리 클래식 미듐을 백화점 상품권을 활용해 693만5500원(3% 할인)에 구입한 리셀러가 며칠 뒤 중고 사이트에서 820만원에 가방을 되팔게 되면, 126만4500원 이득이 남는다. 이 경우 수익률은 18.2%에 이른다.
클래식 라지(상품권 구입가 768만2400원)를 850만원에 판매하면 차익은 81만7600원(10.6%), 보이백 미듐(상품권 구입가 603만3400원)을 647만원에 팔면 43만6600원(7.2%)을 손에 쥘 수 있다.
◇뛰는 샤넬 위에 나는 GD…슈테크 수익률 1270%
지난해 11월 나이키가 가수 GD와 협업해 출시한 '에어 포스1 파라-노이즈'의 판매가는 21만9000원이었다. 국내 시장에는 나이키 로고가 빨간색인 모델은 818켤레, 흰색인 모델은 12만5000켤레만 풀렸다. 매장 앞에서 평균 4시간 넘게 줄을 서서 응모권을 제출한 사람 등을 대상으로 추첨 판매했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여서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운동화는 현재 중고나라와 운동화 판매 정보 카페 '나이키매니아' 등에서 50만~60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해 말 1300만원까지 호가(呼價)가 치솟았던 빨간색 로고 한정판 제품은 300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특정 사이즈를 400만원에 구입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GD 운동화를 55만원에 되팔면 차익은 33만1000원으로 수익률은 151.1%에 이른다. 빨간색 한정판 운동화를 300만원에 거래하면 수익률은 무려 1269.9%다.
지난해 12월 추첨 판매한 ‘오프화이트×나이키’ 덩크 로우는 판매 가격이 20만9000원이었다. 현재 흰색과 초록색이 섞인 파인그린 모델은 70만~80만원대에 재판매된다. 5개월만에 값이 3~4배 가까이 뛴 것이다. 75만원에 되팔면 수익률은 258.9%.
◇'성골P' 붙는 롤테크, 수익률 91.5%
샤넬, 나이키만큼 리셀러가 많은 브랜드가 롤렉스 시계다. 일부 시계 애호가들은 백화점 매장에서 구입에 성공한 제품을 '성골', 병행 수입품이나 중고 거래로 구입한 제품을 '진골'이라고 표현한다. 시계를 사고 싶어도 좀처럼 매장에 제품이 풀리지 않아 몇개월씩 대기를 하거나,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인기 제품은 리셀러에게 이른바 'P'(웃돈을 뜻하는 premium의 앞 글자)를 붙여 구입하기도 한다.
온라인 시계 정보 커뮤니티에선 온갖 명품 시계가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현재 프리미엄이 가장 높게 붙은 모델로 꼽히는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데이토나 스틸 시계는 매장 판매가가 지난해보다 88만원 오른 1599만원이다. 이 제품은 애초에 구하기 어려워 리셀가가 2배 가까운 2950만~2970만원 수준이다. 백화점 상품권을 이용해 1551만원에 구입한 제품을 되팔면 1419만원의 차익을 볼 수 있다. 수익률 91.5%. 시계 마니아인 직장인 송모(38)씨는 "10년 전 데이토나 시계가 광주의 한 백화점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400만원대에 구입했다"며 "10년 찬 시계의 중고 시세도 현재 2000만원대에 형성돼있다"고 말했다.
그린 서브마리너 스틸 시계도 리셀 시장에서 웃돈이 크게 붙는 모델이다. 정식 판매가는 지난해보다 38만원 오른 1139만원인데, 새 상품 매물이 1830만~1870만원대에 거래된다. 상품권으로 이 제품을 1104만8300원에 구입해 중고 시장에서 1870만원에 판매하면 765만1700원을 벌 수 있다. 수익률은 69.3%다.
◇묻고 더블로 가…리셀 시장 폭풍 성장
리셀 산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전문 되팔이꾼들이 유통 질서를 교란한다는 주장, 명품 재테크는 개인의 자유이며 온라인 리셀 산업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올해 세계 리셀 시장 규모는 48조원에 달할 전망이라고 한다.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 출생)가 주도하고 있다.
오가는 판 돈이 커지면서 기업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근 정품 판매·안전 거래를 보장하는 리셀 중개 업체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백화점 셔터가 올라가기도 전에 몸을 숙여 통과하거나, 캠핑 의자를 챙겨 전날 밤부터 매장 앞에서 노숙하는 쇼핑객들과 함께 새로운 플랫폼 시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 스니커즈 거래 플랫폼 ‘스톡엑스(Stock X)’는 출범 3년 만에 1조원 이상의 기업 가치를 평가받았다. 중국에선 투기성 주식매매를 뜻하는 ‘차오구(炒股)’에서 유래한 ‘차오셰(炒鞋·슈테크)’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올해 국내 슈테크 시장에서는 네이버와 무신사가 격돌한다. 네이버 자회사 스노우는 지난 3월 한정판 스니커즈 리셀 플랫폼 '크림'을 출시했고, 국내 최대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이달 말 스니커즈 리셀 플랫폼 '솔드아웃'을 오픈한다. 미술품 경매사도 운동화 리셀 시장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소더비는 뉴욕에서, 필립스는 홍콩·상해에서 운동화 경매를 치렀다. 서울옥션블루도 엑스엑스블루라는 운동화 재판매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패션 플랫폼 '스타일쉐어'는 지난해 11월 명품 리셀 플랫폼 '아워스'를 열고 샤테크족 공략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