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본이 시행한 대(對)한국 수출 규제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기로 했다. 우리 정부의 여러 노력에도 일본이 문제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나승식 산업통상자원부 무역투자실장은 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작년 11월 22일 잠정 정지했던 WTO 분쟁 해결 절차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WTO에 제소하는 사안은 작년 7월 일본 정부가 취한 반도체 생산 필수 소재 3종(고순도 불화수소·플루오린 폴리이미드·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출 규제 강화 조치다. 당시 일본의 규제 발표에 국내에서는 "일본이 정치적 목적으로 미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겨냥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WTO 분쟁 해결 절차는 최종 결론이 날 때까지 2년 이상이 소요되는 데다, 최종심인 상소기구가 기능 정지 상태여서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 반도체 업체들도 소재 다변화에 어느 정도 성공해 제품 생산에 문제가 없는 상태다. 이에 대해 정부는 "WTO 제소를 통해 일본 조치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코로나 사태에 미·중 무역 갈등이 겹치면서 글로벌 공급망에 짙게 드리워진 불확실성 제거와 일본의 수출 규제 재발 방지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 정부의 발표에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무상은 "그간 수출 관리 당국 간의 대화가 계속됐음에도 한국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은 유감"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1년간 갈등 끝에 WTO로
작년 7월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3종 수출 규제는 국내 반도체 업계에 큰 충격을 줬다. 당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은 이 소재 대부분을 일본 업체에 의존했다. 일본이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서자 반도체 업계에서는 "현재 보유한 재고가 바닥나면 자칫 반도체 생산이 멈출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일본은 소재 수출 규제에 이어 8월 한국에 대한 전략물자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백색국가 제외' 조치를 취했다. 이에 맞서 우리 정부는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를 종료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을 우리의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우대국 명단)에서 제외했다. 9월에는 WTO에 일본의 반도체 소재 3개 품목 수출 규제 조치를 제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은 대북(對北) 억지력 약화를 우려하는 미국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우리 정부는 작년 11월 22일 지소미아 파기 결정 유예 및 WTO 제소 중지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일본은 수출 규제를 해제하지 않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달 12일 '수출 규제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고, 만족할 만한 답이 없자 WTO 제소 절차를 재개하기로 했다. 나승식 산업부 무역투자실장은 "정부는 지금 상황이 당초 WTO 분쟁 해결 절차 정지의 조건이었던 정상적인 대화의 진행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소재 다변화로 피해 거의 없어
일본의 수출 규제는 역설적으로 소재 공급 다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계기가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그동안 일본 업체에 의존하던 소재들을 광범위하게 분석했고, 대체재를 찾았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불화수소를 아껴 쓰며 모든 공정을 분석했다"며 "이전에는 전체 공정에서 많은 양의 품질 좋은 일본산 불화수소를 썼다면, 딱 알맞은 양의 불화수소를 공정 특성에 맞춰 국산·중국산·미국산·일본산을 나눠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주로 국내 솔브레인과 램테크놀러지의 불화수소를 사용하고, 일부 중국산 제품도 활용한다. 핵심 공정에서만 일본산 불화수소를 들여와 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일본의 수출 규제는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전 공정을 꼼꼼히 뒤져보는 계기가 됐다"며 "일본 의존도를 낮추며 리스크도 줄인 것"이라고 말했다.
수출 규제는 오히려 일본 업체에 피해를 줬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달 20일 "일본 정부의 소재 수출 규제가 1년 가까이 지속하면서 한국 기업들이 대체 공정 마련에 성공했고, 일본 기업이 역풍을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불화수소 업체 스텔라케미파는 지난 1분기(1~3월) 매출이 전 분기 대비 12% 감소한 337억엔(약 3830억원)에 그쳤다. 특히 한국에 주로 수출했던 95% 이상 고순도 불화수소 출하량은 전 분기 대비 3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텔라케미파와 함께 전 세계 불화수소 시장 70%를 차지하는 모리타화학도 수출량이 규제 이전보다 30% 감소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번 WTO 제소가 업황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교수)은 "한·일 관계가 갈등을 빚으며 불확실성이 여전히 높지만, 정치적 이유로 규제를 시작해 자기네 업체만 피해를 본 일본이 다시 한국 반도체에 대한 규제를 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