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베시 이화학연구소에는 높이 2m인 캐비닛 모양 서버 396개가 연결된 채 놓여 있다. 수퍼컴퓨터 '후가쿠'(富岳)다. 1초에 41경(京)5000조(兆)회 연산이 가능하다. 이는 전 세계 인구 70억명이 쉬지 않고 계산해도 2년 이상 걸리는 양이다.
후가쿠가 22일(현지 시각) 국제수퍼컴퓨터학회(ISC)가 발표한 '세계 상위 500대 수퍼컴'에서 1위에 올랐다. 2011년 11월 수퍼컴 '게이'(京)가 1위에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미·중에 번번이 밀리던 일본이 9년 만에 다시 왕좌를 차지한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모노즈쿠리(장인 정신)로 대표되는 일본 제조 기술력을 다시 한 번 과시한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ISC는 매년 6월과 11월 두 차례 500대 수퍼컴퓨터 순위를 발표한다.
수퍼컴은 일반 컴퓨터보다 수십만배 빠른 고성능 컴퓨터다. 최근 빅데이터 등 IT(정보 기술) 분야뿐 아니라 코로나 치료제 개발의 핵심 인프라로 주목받으며 치열한 개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외국에선 정부와 기업·연구소가 뭉쳐 수퍼컴 개발에 돈을 쏟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해외에서 돈을 주고 사오는 실정이다.
◇4차 산업 핵심 인프라
후가쿠에는 '재팬 테크' 부활을 꿈꾸는 일본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일본은 전자 산업에서 축적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 미국과 수퍼컴 기술 경쟁을 주도했다. 하지만 대규모 자금을 앞세운 중국에 밀리면서 상위권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베 정부는 2014년 1300억엔(약 1조5000억원) 규모의 차세대 수퍼컴 개발을 시작하며 중국에 맞서기 시작했다. 공모를 통해 후지(富士)산의 다른 명칭인 후가쿠로 이름을 붙였다. 일본 최고 산인 후지산처럼 최고 성능의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후가쿠는 지금까지 개발된 모든 컴퓨터의 성능을 압도한다. 연산 속도가 후가쿠에 이어 2위인 서밋(미국)의 2.8배, 일반 노트북 PC의 330만배 이상이다.
일본은 1위 수퍼컴 확보로 코로나 신약 개발에도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정부는 애초 내년부터 후가쿠를 상용 가동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지난 4월부터 치료제 개발에 투입했다. 닛케이에 따르면 일본은 후가쿠를 활용해 2000종의 코로나 신약 후보 물질을 찾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500대 수퍼컴 45%가 중국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 등 주요 선진국은 4~5년 전부터 매년 수천억원을 수퍼컴 개발에 쏟아붓고 있다. 수퍼컴이 미래 산업 성패를 좌우하는 인프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과거엔 기상 예보·지진 예측 등 과학 연구에 주로 쓰였지만, 최근 들어 대형 항공기 설계나 AI 개발, 빅데이터 분석 등 산업계로 활용 폭이 넓어졌다.
IT 업계에서는 미국이 1~2년 안에 세계 최초로 1초에 100경회 이상 연산이 가능한 차세대 수퍼컴을 상용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오랫동안 미국산 부품에 의존했던 중국도 최근 수퍼컴 두뇌에 해당하는 CPU(중앙처리장치)칩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하면서 100경회 연산이 가능한 수퍼컴 개발에 근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이번 순위 발표에서 일본에 1위를 내줬지만, 상위 500대 수퍼컴 중 226개를 보유할 정도로 질과 양 면에서 수퍼컴 강국으로 꼽힌다. 일본도 4~5년 안에 100경회급 수퍼컴 상용화를 목표로 한다.
◇한국은 국산 수퍼컴 '0'
한국은 최근 들어서야 수퍼컴 개발을 시작했을 정도로 기술 경쟁에서 뒤처졌다.
한국은 이번 ISC 조사에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이 보유한 누리온(18위)을 포함해 수퍼컴 3대가 톱500에 들었지만 모두 돈 주고 사온 외국산이다. 이마저도 2018년 7대, 2019년 5대에서 매년 숫자가 줄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2022년까지 자체 기술로 1페타플롭(PF·1초당 1000조번 연산 처리 가능)급 수퍼컴을 제작한다는 목표로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흐름대로라면 자체 개발이 끝나는 2년 뒤에는 한국과 세계의 성능 격차는 1000배 이상으로 벌어질 전망이다.
김창경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교수는 "수퍼컴 기술력은 하드웨어 자체 개발은 물론이고, 소프트웨어 개발·운용 능력도 뒷받침돼야 한다"며 "돈 주고 고가의 외국산 장비를 들여오면 수퍼컴 강국이 된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