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현지 시각) 미국 백악관 인근의 5성급 고급 호텔 '소피텔 라파예트 스퀘어'의 뒷문과 1층 창문은 목재 합판으로 다 막혀 있었다. 얼룩덜룩한 합판 때문에 건물 전체가 누더기처럼 보였다. 인근 건물 상황도 비슷했다. 백악관 뒷마당 격인 라파예트 광장 주변은 물론, 도보 15분 정도 거리 안에 있는 고급 상점과 사무용 건물 상당수는 합판으로 출입구와 저층 창문이 굳게 막혀 있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얼굴이 '합판'이 된 것이다.

13일(현지 시각) 미 워싱턴DC 백악관 동쪽 15번가에 있는 한 건물 출입구와 1층 창문이 나무 합판으로 가려져 있다.

유서 깊은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라파예트 광장 맞은편의 세인트존스 교회도 출입구와 창문은 전부 목재 합판으로 막혀 있었고, 교회 주변을 둘러싼 검은 철책 안에서 경찰관 서너 명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1816년에 완공돼 일명 '대통령의 교회'로 불리는 곳이다. 지난달 1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인종차별 반대 시위 진압을 예고하는 기자회견을 한 직후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현지 신문 '워싱토니안' 보도에 따르면 워싱턴 시내 건물주들이 합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초쯤이었다. 5월 말 백인 경관에 의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항의하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직후였다. 5월 30~31일 워싱턴에서도 시위대가 백악관과 주변 라파예트 광장에 모여들었고, 밤이 깊어지자 일부 시위대는 인근 건물 창문을 깨고 상점에 진열된 명품을 약탈했다. 1928년에 문을 연 백악관 인근의 유서 깊은 호텔 '더 헤이 애덤스' 등도 공격을 당했다. 그 직후 도심 상인과 건물주들이 자구책으로 문과 창문을 합판으로 막았다는 것이다.

더 헤이 애덤스는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합판 위에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란 구호를 인쇄한 종이도 붙였다. 합판으로 출입구를 막지 않은 건물들도 '인종차별을 종식하자(End Racism)' 같은 구호를 인쇄한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로부터 한 달 보름이 넘게 합판을 떼지 못하는 데는 지난달 내내 간헐적으로 발생한 시위가 영향을 미쳤다. 백악관 앞에서 만난 한 경찰관은 "시위는 거의 끝났지만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건물주들이 합판을 떼지 않고 있다"고 했다.

다른 이유도 있다. 코로나 유행으로 인한 일종의 '도심 공동화'다. 지난달부터 워싱턴도 경제 재개를 위해 일부 제한 조치를 완화했지만, 도심으로 출근하던 직장인 대부분은 여전히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직장인과 관광객을 상대하던 도심의 호텔·식당·카페 등도 상당수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많은 건물이 입주자 없이 비어있다 보니 약탈과 절도 피해를 피하기 위해 건물주들이 합판으로 건물을 막아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다른 미국 대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심의 합판이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코로나 타격을 가장 많이 받았던 뉴욕이었다. 코로나로 도시 기능이 마비되고 휴업이 시작된 지난 3월 맨해튼의 고급 상점들은 일시 폐쇄하게 된 가게 건물의 문과 창문을 합판으로 막았다. 201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 '노란 조끼 운동'이 미국으로 번졌을 때, 약탈 피해를 본 적 있는 상인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고 한다.

이어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의 명품 쇼핑가 로데오 거리에도 합판이 등장했다. 시위대가 도심의 자치 구역까지 선포한 시카고도 많은 건물의 문과 창문이 합판으로 막혀 있다. 다른 미국 대도시에 비하면 워싱턴 도심에 합판이 등장한 것은 뒤늦은 편이다. 합판으로 뒤덮인 도심 풍경은 코로나와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미국에 남긴 또 하나의 상흔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