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미 대선에서 공화·민주 양당의 대통령 후보는 각주(各州)에서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표(popular vote)를 가져가는 게 아니라, 그 주에 할당된 소속 정당의 선거인(electors)를 확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조 바이든 후보가 플로리다 주에서 1표 차로라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이기면, 그 주에 할당된 선거인 29명을 독차지한다. 이런 방식으로, 50개 주와 워싱턴 DC에 할당된 538명의 전체 선거인 중 과반수(270표 이상)을 차지하는 후보가 당선한다. 두 후보가 확보한 선거인들은 워싱턴 DC에서 다시 ‘투표’를 하지만, 이는 주 유권자들의 선택을 따르기 때문에 11월3일의 대선 결과가 뒤바뀌지는 않는다.

2016년 12월 워싱턴 DC에서 선관위 직원들이 각주에서 선출된 선거인(electors)들이 대통령 투표한 용지를 모으고 있다. 개표는 2017년 1월6일 당시 상원의장이었던 조 바이든 부통령의 주관 하에 양원 합동회의 직전에 했다.

문제는 한 후보가 미 유권자 전체 투표(popular vote)에선 이기고도, 선거인 과반수 획득에선 실패하는 일이 흔치 않게 발생한다는 점이다. 미국 역사에선 다섯 차례 있었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에게 286만 표를 뒤지고도, 304표의 선거인 표를 확보해 이겼다. 2000년 조지 W 부시도 앨 고어에 54만표 뒤졌지만 선거인 과반수(271표)을 확보해 당선됐다. 한 주에서 크게 지고도, 여러 주에서 아슬아슬하게 이기면 이런 역전(逆轉)이 발생한다.

하지만, 미국은 왜 전체 민의도 왜곡하고 직접 선거도 아닌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 제도를 계속 고집하는 것일까. 최근 ‘왜 우리는 선거인단을 유지하나(Why Do We Still Have the Electoral College?)라는 책을 낸 하버드대 역사학자 알렉산더 케이사 교수는 “선거인단 제도를 없애려는 수 차례의 노력이 뿌리 깊은 백인우월주의의 저항에 밀려 좌절됐다”고 주장했다.

19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헌회의 모습을 그린 유화


◇노예 많은 남부 "흑인 1명을 백인의 3/5명으로 인정해 달라"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 각주 대표들은 국가 원수를 뽑는 방안을 수개월 논의했지만, 교착 상태에 빠졌다. 노예가 상대적으로 적고 백인 인구가 많은 북부 주들은 백인 남성만의 투표(popular vote)를 요구했지만, 전체 인구의 40%(200만 명)가 노예인 남부 주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결국 흑인 노예 한 명도 백인 한 명의 5분의 3으로 계산해 인구에 비례해 주(州)마다 선거인을 할당하고,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뽑는 것으로 타협했다.
최초의 선거인단 91명은 이렇게 확정됐다. 20만 명 이상의 노예를 둔 버지니아는 선거인단 과반수(46명)의 4분의1인 12명을 확보했다. 미국 건국 초기 36년 중 32년간 대통령이 버지니아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물론 당시엔 정당이 없어서 유권자들이 우후죽순 나올 수 있는 후보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포퓰리스트들이 선동하면 휘둘릴 수 있다는 우려도 선거인단 제도의 필요성으로 작용했다.

◇남부 주들, 노예제 폐지 후에도 '전체 유권자 투표 결정' 법안 결사 반대
1816년 대통령을 전체 유권자 투표로만 뽑자는 수정안이 의회에 처음 제출됐다. 그러나 남부 주들은 백인 남성 유권자들에 더해, 노예들도 5분의3인으로 계산돼 선거인을 '두둑하게' 할당 받는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1870년 흑인이 투표권을 갖게 된 뒤[수정헌법 15조]에도, 남부 주들은 '선거인단' 간접 선거를 고집했다. 남부 주들을 장악한 백인 민주당 정부는 흑인의 투표권 행사를 다양한 방법으로 막으면서도, 이제 전체 유권자엔 '자유 흑인'까지 온전한 1인으로 포함돼 할당된 선거인 수는 더 많아졌다. 역설적으로, 남북 전쟁 이전보다 오히려 '선거인단'제도의 정치적 혜택을 더 누리게 됐다. 1947년 "미 합중국에서 선거인단 제도만이 남부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내용의 책자가 남부 민주당의 필독서가 됐다.

◇선거인단 폐지 가장 최근 시도는 1970년
그러나 선거인단을 폐지하자는 개헌(改憲) 주장은 계속 됐고, 1969년 미 연방하원은 '선거인단 폐지' 법안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법안은 1970년 9월 미 상원에서 남부 분리주의자 의원들의 잇단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 무제한 토론)에 막혀 끝내 무산됐다. 당시 남부 출신 상원의원의 75%가 필리버스터 종료에 '반대' 투표를 던졌다. 하버드대의 케이사 교수는 "남부의 민심은 변하고 있었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의원들은 백인우월주의 의식을 벗어나지 못했고, 흑인 민권운동이나 투표권법에 적대적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선거인단이란 간접투표가 계속 유효한 이유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저항' 탓이라는 하버드대 역사학자 케이사 교수

미국 헌법을 개헌하려면, 연방 상·하원에서 3분의2가 찬성하고 50개 주의 4분의3이 찬성해야 한다. 지금처럼 공화·민주 양당이 극단으로 맞서고, 불과 수십 년 전과는 반대로 ‘백인 우월주의’ 분위기가 미 공화당을 장악하고, 트럼프가 직전 대선에서 ‘선거인단’ 선거의 덕을 톡톡히 본 상황에서 개헌(改憲)은 요원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