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이가 너무 없네?" "데모치로 해주세요." "니주를 좀 깔아야겠는데." 방송 촬영 현장에서 수십 년째 쓰는 은어들이다. '시바이(しばい·연기 또는 연극)가 없다'는 말은 '웃음 요소가 없다' '상황에 맞는 연출이나 연기가 부족하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고, '데모치(てもち·직접 들다)로 찍다'는 '카메라를 어깨에 올려 찍는다'는 뜻이다. '니주(にじゅう·이중)를 깐다'는 건 두 가지 의미다. '복선을 깐다'는 뜻이거나, 발밑에 덧마루를 깐다는 뜻도 된다.
알쏭달쏭한 방송계 일본어의 뿌리는 영화계로 추정된다. 1960년대 TV 방송의 시초부터 이런 용어를 썼다. 당시 카메라·영상 인력을 영화계에서 뽑았는데, 영화계는 이미 1900년대 초반부터 일본 영상 기술의 영향으로 일본식 용어를 사용해왔다. 이후 수십 년간 방송 문화와 기술력이 몰라보게 발전했지만, 입으로 전해지는 단어들은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우리말로 충분히 바꿔 쓸 수 있는데도 문제의식 없이 쓰는 경우가 대부분. 뉴스 보도 현장에서 일하는 한 20년 차 PD는 "'그 단락 걷어내' 하면 될 것을 괜히 '구다리(くだり) 아웃'이라고 쓴다. 귀에 딱 꽂히고, 전문용어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럴 것"이라고 했다. 7년 차 예능 PD는 "촬영 현장뿐 아니라 PD들끼리 모이는 사적인 자리에서도 '시바이 치지 마(연기하지 마·내숭 떨지 마)' '니주 깔지 마(밑밥 깔지 마)' 등 업계 용어를 쓰는 일이 많다. 이런 단어를 쓰며 소속감이나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일본어인 줄 모르고 쓰는 단어도 있다. '입봉'이 대표적이다. 영화나 방송계에서 조연출(조감독)이 처음으로 연출을 맡아 자기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일을 '입봉한다'고 표현한다. 이한섭 고려대 일본어학과 명예교수는 "입봉은 '잇폰(いっぽん·一本)'이라는 일본어에서 유래했다. '남의 부축을 받지 않고 한 다리로 서다' '홀로 서다' '독립하다'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했다. '잇폰'이란 단어는 과거 일본에서 홀로 독립한 게이샤를 뜻하기도 했다.
뉴스를 다루는 언론계 사정도 다르지 않다. 방송·신문기자들은 '야마' '사스마리' '나와바리' 같은 은어를 일상적으로 쓴다. '야마'는 '최고조' '제일 중요한 것' 등을 의미하는 일본어 '야마(やま)'를 가져다 '기사의 핵심·주제'란 의미로 쓴다. '사스마리'는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건기자란 뜻으로, 일본어 '사쓰마와리(さつまわり)'를 그대로 가져왔다. '나와바리(なわばり)'도 자기 영역, 담당 구역을 뜻하는 일본어 그대로다.
언론계 일본어의 역사도 뿌리 깊다. 이재경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는 "1920~30년대 일본에서 교육받은 인력이 한국에 들어와 신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단기간에 '기자 문화'가 만들어졌다. 용어뿐 아니라 언론 생태계 전체가 그 당시 일본 흔적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면서 "젊은 기자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고치려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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