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동북쪽으로 여행할 때면 흔히 베네치아를 끝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거의 끝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위용부터 이미 유럽 것이 아니다. 사라센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둥근 돔 지붕들은 사실 동방의 모습이다. 그것을 처음 본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서유럽 사람들은 자신이 유럽의 끝에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유럽의 끝도 이탈리아의 끝도 아니다. 베네치아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북쪽 해안을 따라서 2시간 이상이나 동쪽으로 달리면, 열차는 트리에스테(Trieste)라는 도시에 닿는다. 이름부터가 슬프다. 발음이 흡사한 '트리스테(triste)'란 말은 '슬프다'는 뜻이다. 처음 이 도시 이름이 '슬픈 도시'로 읽혀서 놀랐는데, 그때의 처연했던 기억은 지금도 여전하다. 트리에스테는 이탈리아의 도시라는 분위기가 거의 없다. 베네치아의 속국이었지만, 14세기부터 오스트리아가 점령하여 약 600년간 오스트리아 제국의 항구였다.
그래서 트리에스테 도심은 빈을 연상시키는 오스트리아 분위기가 짙게 남아있다. 오스트리아를 내륙 국가라고 생각하여 바다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중동부 유럽을 지배하던 거대한 제국은 바다를 확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중에서 수도 빈으로 들고 나가는 물자 대부분이 거치는 가장 중요한 항구가 트리에스테였던 것이다.
릴케가 머무른 두이노성
그러나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트리에스테 시내가 아니다. 외곽의 해안 도로로 잠시만 나가면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성채가 서 있다. 화려하거나 섬세한 프랑스나 독일풍과는 완전히 다른 군사용 요새를 연상시키는 견고한 건물이 절벽 위에 있다. 이곳이 두이노(Duino)성이다. 가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성을 보기보다는 한 사람의 자취를 느끼려는 것이다. 그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1875~1926)다.
아름다운 세 단어로 이루어진 그의 이름을 가리켜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름 자체가 이미 한 편의 시다"라고 말했다. 장미 가시에 찔려서 죽었다는 20세기의 전설을 남긴 릴케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땅이었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아들을 장교로 만들고 싶은 아버지의 바람을 따라 그는 빈의 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너무 조숙하고 섬세하고 도덕적이었던 아이는 거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였다. 그의 개성은 "노동자가 되기에는 너무 지적이었고, 귀족이 되기에는 너무 세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사관학교를 자퇴하고 상업학교나 뮌헨 대학 등으로 옮기지만 어디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릴케는 파리로 떠나면서 평생에 걸친 방랑 인생을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시인이 되었다. 릴케는 유럽 곳곳을 방랑하면서 많은 시를 써서, 나중에는 20세기 독일어권 최고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시뿐만 아니라 소설과 논문과 편지를 아우르는 그의 많은 저작은 인간성을 상실해가던 20세기 초의 산업 시대에 늘 순수한 영혼의 가치를 부르짖고 있다.
진정한 예술 후원자 탁시스 가문
릴케가 34세였던 1909년, 아직은 위대한 시인이라기보다는 젊고 덜 알려진 문필가였던 그는 투른 운트 탁시스 후작 부인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2년 후인 1911년 가을 탁시스 부인의 운전기사가 릴케를 찾아오고, 릴케는 그 차로 운전기사와 함께 산레모, 피아첸차, 볼로냐, 베네치아를 거쳐서 탁시스 부인의 소유였던 두이노성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두이노성에 머문다. 성에서 지내는 동안 릴케는 매일 저녁 후작 부인에게 단테의 '새로운 인생'을 읽어주었고, 둘은 예술과 인생에 관한 끊임없는 토론을 벌인다. 그 결과는 1912년 그곳에서 릴케가 쓰기 시작한 장대한 명시 '두이노 비가(悲歌)'로 탄생한다. 두이노성에서 '제1 비가'와 '제2 비가'를 완성한 릴케는 원고를 들고 온 유럽을 다니다가 10년 만인 1921년에 스위스의 오두막에서 '제10 비가'를 끝으로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릴케는 두이노를 떠난 후에도 계속 편지를 보내어, 릴케와 후작 부인 사이의 문학적 우정으로 이어진 귀중한 편지 460통이 남아 있다.
아드리아해(海)가 내다보이는 두이노성의 창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될 것만 같다. 그러나 이곳의 광대한 풍경은 서정적인 시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50m 높이로 수㎞에 걸쳐서 펼쳐진 낭떠러지의 장관은 분명 인생의 이상(理想)을 노래하는 시가 탄생할 장소다.
또한 두이노성은 유럽에서 많은 고악기(古樂器) 컬렉션을 보유한 곳의 하나로, 탁시스 가문의 음악에 대한 높은 관심을 말해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방에서 릴케도 많은 연주를 들었던 것이니, 역시 그의 창작 원천 중 하나였다. 성 아래 절벽에는 정원사가 정성껏 가꾸어놓은 붉은 장미들이 우거진 산책로가 있는데, 이름이 '릴케의 산책로'다.
두이노성에서는 두 가지를 느낀다. 하나는 예술가의 생이다. 예술가란 족속은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아 세속에서는 불구가 되었다. 대신에 그들은 비속한 세상의 성공을 포기한 대가로 더 큰 세계를 얻었다. 그런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구차한 생활에 매몰될까 봐 재능에만 헌신할 환경을 제공해주는 사람을 후원자라고 부른다. 두이노성은 예술가뿐 아니라 아낌없고 진정한 후원자의 상징이다. 생색내면서 같이 밥 먹고 사진 찍고 어울리는 것이 후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