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윤 편집국 문화부 차장·더부티크 편집장

드는 것 자체로 화제인 가방이 있습니다. 바로 텔파 가방인데요. 라이베리아 출신 미국인 텔파(Telfar) 클레멘스(35)가 지난 2005년 뉴욕에서 선보인 브랜드입니다. 1990년 라이베리아 내전을 피해 클레멘스의 부모가 이민을 오게 되면서 미국에 정착한 인물이죠. 뉴욕 퀸즈에 자리잡고 살다가 브랜드를 만들 당시는 현재 가장 '핫'한 지역인 브루클린 부쉬윅에서 자리잡았습니다. ‘젠더리스’라는 개념이 많지 않을 시절부터 젠더리스를 내걸고 남녀 공용으로 들 수 있는 가방을 만들었지요. 텔파를 상징한 T와 C를 딴 로고 역시 한눈에 확 띕니다.

그래서 텔파 백은 ‘부쉬윅의 버킨백’이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버킨 백 가격을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주요 타킷 가격은 미국에선 150달러에서 257달러선. 우리 돈으로 비싸도 30만원이 채 안되는 가격입니다. 텔파의 슬로건 역시 ‘NOT FOR YOU FOR EVERYONE’입니다. 당신만을 위한 게 아니라 모두를 위한 가방이란 뜻이지요. 럭셔리가 주장하는 ‘희소’와는 완전히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구할 수가 없다네요. 워낙 인기가 많아서 온라인 사이트에 나오기만 하면 ‘품절’을 기록하기 때문이라지요. 대기표 뽑고 기다려야 할 정도니 버킨 백이 따로 없다네요.

뉴욕의 가장 역동적이고 젊은 디자이너로 꼽히는 텔파는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 어느덧 ‘최고의 디자이너’ 대열에 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2017년 텔파의 유명 쇼핑백으로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가 선정하는 패션 펀드 수상자로 결정된 데 이어, 올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남성쇼인 피티워모 2020AW에 초청 디자이너로 무대를 장식한 바 있습니다. 승승장구하는 그는 지난달 미패션계 최대 시상식인 CFDA 어워즈에서 올해의 액세서리 디자이너 상까지 거머쥐었습니다.

텔파 가방

텔파 글레멘스의 ‘부상’은 단순히 디자인의 수월성에만 초점을 맞추기는 부족해 보입니다. 단순히 디자이너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징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지요. 라이베리아 출신 이민자에 흑인, 또 젠더리스를 내세우면서 LGBT(성소수자)의 인권을 대변하는 다양성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젊은 정치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이 텔파 백을 들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면서 화제를 이끌었습니다. 또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텔파 백을 홍보하면서 다시한번 ‘텔파’를 외치게 했습니다.

단순히 소량으로 제작해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이젠 텔파백을 멘다는 것 자체가 정치외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요.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다양성을 응원한다는 자신의 성향을 드러낼 수 있고, 흑인 인권에 대한 목소리 역시 함께 높인다는 겁니다. 의상을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새겨 넣었던 것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직관적입니다.

과거에 가방은 ‘신분’을 대신하는 도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비싼 가방을 든다는 것은 그만큼 ‘난 이 정도의 가치가 있어’를 대신한다는 증표가 된다는 것이지요. 자본과 소비의 매개체에서 이제 가방은 정치적 도구로의 폭이 확대됐습니다. 어떠한 표식 하나 없이도, 메시지를 담지 않아도 제품 자체가 '나'를 드러내는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