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사는 윤세웅(47)씨는 선천성 청각장애인이다.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그에게 눈은 세상을 보게 하는 창구이자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유명 제화회사에서 구두를 만들던 그는 2017년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며 흐려졌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희귀난치병인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았다. 평생을 눈으로 소통하며 살아온 그에게는 더없이 큰 절망이었다.
윤씨는 점자(點字)를 배우기 위해 시각장애인 복지관에 갔다. 하지만 청각장애인은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안내받았고, 청각장애인 복지관에서는 시각장애 때문에 거절당했다. 결국 독학으로 점자를 익힐 수밖에 없었다.
홍유미 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장은 “시청각장애는 장애인복지법상 별도의 장애유형으로 구분돼있지 않아 윤씨처럼 어디서도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정확한 실태조사조차 이뤄진 적 없어 고립된 시청각장애인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추정밖에 할 수 없다”고 전했다. 미국과 일본 등은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법·제도를 시행하며 ▲지원센터 설치·운영 ▲생활 자립 교육 ▲의사소통 지원 전문 인력 양성·파견 등을 제공한다. 그러나 국내 시청각장애인들은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에서 교육·의료·복지 등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헬렌켈러센터 자조모임·동료상담사 활동을 통해 찾은 희망
2019년 설립된 국내 최초 시청각장애인 전문기관인 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는 ‘당사자’ 중심으로 시청각장애인의 ‘자립 역량 강화’ 사업 등을 전개 중이다. 대표적으로 자조(自助)모임과 동료상담사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윤씨는 매주 목요일 헬렌켈러센터 자조모임에 참여해 자신과 같은 시청각장애인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일상 및 정보도 나눈다. 또 동료상담사로서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청각장애인들을 만나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활동까지 펼치고 있다. 장애와 동시에 세상과 단절되는 경험을 겪은 시청각장애인들은 자신과 같은 상황의 윤씨에게 위안과 용기를 얻는다. 더불어 이들이 점자·촉수화(觸手話) 교육, 자조모임 등 네트워크 연대로 자립의 뿌리를 다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헬렌켈러센터의 동료상담사들이 찾아낸 시청각장애인은 지난해만 75명이었다. 올해는 100명 이상 발굴할 계획이다.
◇시청각장애인 전문 복지사업 전개로 자립 역량 강화
헬렌켈러센터는 지난해 점자정보단말기 무상 지원·대여 사업을 시작했다. 문자와 점자를 상호 교환하는 점자정보단말기는 시청각장애인의 독서나 학습뿐만 아니라 인터넷 정보 검색, 온라인 소통 시 필요하다. 하지만 600만원이 넘는 고가(高價)인 데다 정부 지원을 받기도 쉽지 않다.
촉수화 통역사와 시청각장애인 전문 활동지원사도 양성하고 있다. 올해 안에 ‘촉(觸)신호’ 매뉴얼도 출간할 예정이다. 촉신호는 등과 팔에 간단한 신호를 전달해 ‘누가 웃고 있다’ 등의 사회적·공간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 보조 의사소통 수단이다.
홍 센터장은 “인식 개선과 입법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시청각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교육받고, 자립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도 장애인 복지 사업 주력
코로나19 이후 장애와 질병이 있는 취약계층은 복지관·재활병원·직장 폐쇄 등으로 더욱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히 장애아동들은 면역력이 낮고, 감염 시 건강이 빠르게 악화될 위험이 있다. 이에 밀알복지재단은 코로나19 초기부터 장애아동 가정 대상으로 코로나19 확산 방지 키트를 지원하는 ‘힘내요 우리’ 캠페인을 진행했다. 해외에서도 저소득 취약계층 지역주민들의 생존권 보호를 위해 ▲식량·위생키트 지원 ▲가정용 간이 세수용 물통 설치 ▲위생 교육 등을 실시했다.
올해도 다양한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먼저 기업과 시민으로부터 신상품이나 중고물품을 기증받아 판매하는 ‘굿윌스토어’ 4곳, 기업으로부터 재고·이월상품을 기증받아 판매하는 친환경 나눔스토어 ‘기빙플러스’ 8곳을 새로 개소해 장애인 등 취약계층의 일자리로 활용한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어려움에 처한 우크라이나 피난민을 위한 긴급구호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인접국으로 이동할 때 거쳐야 하는 리비우(Lviv) 지역에서 무료급식과 임시 휴게 숙소를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도 신현국 유산기부자의 기부로 장애인 거주시설 ‘베다니동산’을 오픈할 예정이다. 밀알복지재단은 생애 주기의 마지막 단계에 놓인 장애인 시설까지 마련함으로써 ‘장애인 생애 주기별 복지서비스’의 전(全)단계를 완성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