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찾은 거제 하청야구장은 쌀쌀한 바닷바람이 무색할 만큼 선수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곳은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1차 전지훈련 장소다. 한화 관계자는 “감독님이 선수마다 잘하는 부분을 콕 짚어 더 발전시키자고 독려하면서 선수들도 신이 났다”며 “감독님 눈에 들기 위한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손가락 하트를 만든 카를로스 수베로 한화 이글스 감독. 그는 “스마트폰 앱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며 “자기 전에 ‘내일은 이 표현을 써봐야지’ 마음먹는데 막상 훈련장에 나가면 잊어버린다”며 웃었다. /김동환 기자

◇ “한화는 나에게 운명 같은 팀”

지난 시즌 한화는 압도적인 꼴찌였다. 5월 31일부터 5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프로야구 역대 최다 타이인 18연패도 당했다.

뼈를 깎는 혁신이 필요한 상황에서 한화는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 주루 코치를 지낸 카를로스 수베로(49·베네수엘라)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그는 수많은 마이너리거를 빅리그로 올린 ‘육성 전문가’다. 밀워키 브루어스 더블A 팀 사령탑으로 있을 땐 7명을 한꺼번에 메이저리그로 승격시켰다.

한화 숙소인 벨버디어 리조트에서 마주한 수베로는 ‘손가락에 딱 맞는 반지’처럼 완벽한 타이밍에 한화가 영입 제안을 해왔다고 했다.

“30년간 미국 야구 모든 레벨을 경험한 터라 진지하게 은퇴를 생각하고 있을 때 한화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아시아 팀이라 일단 끌렸는데 팀 과제가 ‘리빌딩(재건)’이라고 하니 ‘이건 운명이다’ 싶더라고요.”

지난 시즌 수없이 실패를 겪은 한화 선수들에게 수베로가 부임 후 강조한 키워드는 ‘실패할 자유(freedom of fail)’다.

“선수가 한 베이스를 더 가려는 주루를 했을 때 아웃되더라도 그 시도를 높게 평가하고 기운을 북돋아 줘야 한다는 겁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선수는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수베로 감독은 “공격적인 베이스러닝이 성공하는 사례가 많아지면 팀원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며 “작전 하나하나의 결과보다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생각해 밀고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실패할 자유’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잘하려고 하다가 나오는 실수는 격려해 주지만, 더 나아지려는 노력 없이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실수는 저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설을 맞아 한복을 입고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수베로 감독. 그는 한복을 입자 "왕이 된 기분"이라며 즐거워 했다. / 김동환 기자

◇ “나는 실패한 9번 타자”

문득 ‘수베로의 야구’가 궁금해졌다. 그는 “현역 시절 나는 언제 팀에서 방출될지 모르는 9번 타자였다”며 말을 이어갔다.

“부족한 재능을 만회하려고 유격수 수비를 볼 때도 뭐 하나 허투루 보지 않았어요. 투수의 손가락 움직임과 포수가 고쳐 앉는 자세, 타자의 버릇 등 사소한 부분도 안 빠뜨리려고 했죠. 그렇게 세월이 쌓이며 제 나름의 디테일한 야구가 완성됐습니다. 기본적으로 공격적인(aggressive) 야구를 추구하면서 상대가 조그만 틈만 보여도 디테일하게 파고드는 게 제 야구입니다.”

‘리빌딩’이 목표지만, 성적도 놓칠 수 없는 것이 국내 프로야구의 현실이다. “어떤 팬도 지는 경기를 보러 경기장에 오지 않는다”고 한 수베로 감독은 “한 가지 확실하게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우리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100%를 쏟아붓게 하겠다는 것”이라며 “전력을 다하는 허슬 플레이로 매일 밤 이기려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이너리그 감독 시절 각각 포수와 내야수였던 켄리 잰슨과 페드로 바에스(이상 LA 다저스)를 투수로 전향시켜 큰 성공에 이르게 했다. 한화 팬들은 올 시즌 수베로의 눈도장을 받은 ‘깜짝 스타’를 꿈꾼다. 수베로 감독은 “실제 보니 영상으로 봤을 때보다 잠재력을 가진 선수들이 훨씬 더 많다”며 “일단 기본기가 좋고 성실한 선수들이 많아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수베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탯은 무엇일까. 일단 그는 이른바 ‘볼삼비’라 불리는 볼넷/삼진 비율을 중시한다. “작년 정은원의 기록을 보니 볼넷과 삼진 비율이 1대1이더라고요. 스무 살 선수가 그런 기록을 내기가 쉽지 않은데 눈에 띄었어요.” 타자라면 경기 막판 득점권 찬스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투수의 경우엔 주자가 많은 상황에서 어떻게 위기를 돌파하는지를 꼼꼼히 살펴본다고 했다.

수베로 감독은 "한국 팬들이 열정적인 베네수엘라 팬들과 성향이 비슷하다고 들었다"며 "팬들의 큰 사랑에 보답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김동환 기자

◇ 선수 이름 외우기 미션 완료

매번 정해진 시간을 넘어 훈련을 이어가는 ‘열정남’ 수베로가 최근 가장 공을 들인 일은 선수들의 이름 외우기다. 그가 가장 이름을 쉽게 외운 선수 중 하나가 장운호. 운호란 발음이 스페인어로 ‘1’을 뜻하는 uno(우노)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달린 결과, 이제 얼굴을 보면 이름이 튀어나오는 단계가 됐다. 수베로 감독은 “최근에 샤워장으로 향하는 선수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장운호, 통역은 김민하라고 했는데 내가 맞아 뿌듯했다”며 웃었다.

아내와 딸, 아들과 함께 한국에 온 수베로는 훈련이 끝나면 숙소에서 가족들과 온전히 시간을 보낸다. 술·담배는 물론 커피도 입에 대지 않는 그는 가족과 함께하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했다. 입국 당시 한화 모자를 썼던 둘째딸 안드레아(20)가 야구에 죽고 사는 마니아다. 막내아들의 이름은 수베로와 같은 카를로스(19). 장남의 이름은 카를로스로 짓는 집안 전통이 있다고 했다.

“저는 손자가 둘 있는 할아버지입니다. 첫째딸 카일라(30)가 두 아들을 뒀거든요.”

◇ “도전할 수 있어 야구를 사랑한다”

수베로 감독의 롤 모델은 1995년 별세한 아버지다. “늘 가정적이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배웠어요. 아버지가 늘 ‘네가 최고’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을 가슴 속에 새기고 삽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야구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응원해준 존재라고 했다.

“학창 시절 공부와 야구의 갈림길에서 훨씬 더 성공이 어려웠던 야구를 택한 이유는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야구는 지금도 정말 어렵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가 제 뜻을 지지해주셔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아요. 현재 한국에 와 있는 것처럼 끊임없는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제가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먼 훗날 팬들에게 ‘감독 수베로’가 아닌 ‘필드에 나와 늘 최선을 다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수베로 감독이 사진 촬영을 위해 마스크를 잠시 벗었다.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닮은 것 같다고 하자 그는 “그런 얘기를 자주 듣는다”며 껄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