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기사 60주년을 맞은 조훈현 9단은 “행복하고 보람 있는 세월이었다”며 “후배들이 한국 바둑의 영광을 오래 지속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기억이 아슴프레 합니다. 정말로 세월 빠르네요.”

올해는 조훈현(69) 9단이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을 수립한지 꼭 60년 되는 해다. 조선일보 PDF(이동가능 문서형식) 검색 결과 그의 입단일은 1962년 10월 14일로 밝혀졌다. 만 9세 7개월 때였다.

“다섯살 때부터 아버지 무릎에 앉아 바둑 구경을 해왔다는 조훈현 군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 꼬마기사로 입단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조선일보 10월 16일자 7면 박스 기사 첫 대목이다. “예선서 13전 전승, 본선에선 10승 2패를 기록하면서 1위로 초단의 사닥다리를 뛰어넘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그의 입단을 처음 보도한 1962년 10월 16일 자 조선일보 기사. 만 나이를 쓰는 요즘과 달리 열 살로 표기돼 있다.

입단 전후 일화를 들어보았다. “2남 4녀인 형제들이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집안이 기울었다. 목포에서 서울로 이사 후 나는 초등학교를 다섯 번 옮겨다녀야 했다. 한동안 정해영, 박종규씨 등 바둑광인 정·관계 거물들 댁에서 기식했다. ‘입 하나 던다’는 차원으로 보내진 것이다.”

당시 국내 바둑 수준에 대해 그는 “지금과 비교해 3점, 집으론 30집쯤 차이”였다고 분석했다. 63년 초 국제 전화대국을 가진 다섯 살 위 이시다(石田芳夫)와도 그 정도 격차였다.” 그해 2단이 된 조훈현은 일본 유학길에 올라 4년만인 67년 일본기원 초단 면장(免狀)을 받아든다. 한·일 양국서 입단한 유일한 사례다.

“입단 전 후지사와(藤澤秀行) 선생과의 실전 대국 덕을 톡톡이 봤다. 한 판 당 5~10분짜리 초속기로 200~300판 가량 배웠다. 1승에 한 점씩 치수를 바꾸는 식이었다. 3점으로 시작해 선둘(정선과 2점 사이) 치수로 2년이 지나니 정선(定先)으로 성장했다. 그러자 선생은 앞으론 승패와 관계없이 흑으로만 두라고 하시더라(웃음)”.

스승 세고에(瀨越憲作) 선생 댁 책꽂이에서 우연히 뽑아든 정석 책은 그의 개안(開眼)을 결정적으로 도왔다. “연감 2~3권 분량의 부피였는데, 한 밤 바둑판 없이 눈으로 훑는 식으로 다 읽고나니 동이 터왔다. 우격다짐으로 두어오던 내게 그것은 신세계였다. 황톳길만 뛰다 안내판 달린 포장도로를 처음 달리는 기분이랄까, 그 때도 최소 반 점은 늘었다.”

조 9단은 두 차례 입단 때의 상반된 느낌을 이렇게 기억했다. “아홉 살에 프로가 됐을 때는 종착역에 도착한 듯 들뜨고 기고만장했다. 반면 5년 뒤 일본기원서 두 번째 입단한 순간엔 이제 진짜 승부가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사명감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조훈현의 ‘기록 반상(飯床)’은 온갖 진수성찬으로 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최연소 입단 외에 통산 최다승(1959승 9무 838패), 최다 우승(160회), 단일 기전 최다연패(패왕전 16연패), 최고령 세계제패(49세 10개월·2003년 7회 삼성화재배) 등 세계 기록들이 모두 그의 소유다. 여기에 ‘프로 60년’이란 희귀 특식(?)까지 추가됐다.

본인은 “최연소 입단 기록이 다른 무엇보다 자랑스럽다”고 했다. 가장 기뻤던 순간은 제1회 잉씨배 우승, 그리고 생전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은 통산 2000승을 채우는 것이다. 고작 41승이 남았을 뿐인데 조9단은 ‘쉽지 않다”며 고개를 젓는다. 2년 전 정계를 떠나 복귀한 이후 국제 시니어대회 등 초청 기전에만 선별 출전하고 있다. 올해 그가 소화한 대국은 4판.

“지난 세월 하루 하루가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한일 양국 바둑 위상 변화를 떠올리면 감개무량하다.” 조9단은 “선배들이 어렵게 쌓은 탑을 후배들이 잘 지켜주기만 바랄 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