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이 3일 8강전에서 중국에 패배한 뒤 코트를 떠나고 있다. /뉴시스

한국 프로농구 리그에선 골 밑의 제왕이던 라건아(34·199㎝). 3일 벌어진 중국(세계 29위)과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8강전에서는 맥을 못 췄다. 최고 2m14에 달하는 중국 장신들에게 밀리자 중장거리 슛을 자주 던졌고 14점 7리바운드(야투 성공률 42%)에 머물렀다. 경기 결과는 한국의 70대84 완패. 전력(한국 세계 51위)상 열세라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저우치(27·2m16) 등 중국 주축 선수들이 부상 등으로 불참해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19번 아시안게임 중 2006년 도하 이후 역대 두 번째 남자 농구 4강 진출 실패다.

이날 높이 싸움에서 밀리면서 3점 슛으로 활로를 찾으려 했지만 한국농구연맹(KBL) 최우수 선수(MVP) 출신 허훈(28)과 대표 슈터 전성현(32)이 각각 2점, 7점에 그치면서 반전에 실패했다. 허훈은 3점 슛 3개를 던져서 모두 빗나갔고, 전성현은 5개 중 1개만 적중시켰다. 경쟁 상대인 중국과 이란, 일본 등이 2진급들을 내보내 금메달까지 내심 기대했지만 결과는 참사에 가까웠다. 여자 농구 역시 일본과 준결승에서 58대81로 무릎을 꿇었다. 남북단일팀으로 나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지난 대회에 못 미치는 성적이다. 시종일관 일본에 끌려다니면서 이렇다할 반격 한 번 못해 보고 대패했다.

여자 농구 대표팀이 3일 중국 항저우 올림픽 스포츠센터 체육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농구 준결승에서 일본에 패한 후 경기장을 나서고 있다. 정선민 감독이 이끄는 여자 농구 대표팀은 이날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3점슛 14개를 허용하며 58-81로 패해 결승진출이 좌절됐다. 2023.10.3/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농구뿐 아니다. 세계 무대는 멀어 보여도 아시아권에선 최강권을 유지하던 구기(球技) 종목들이 이번 아시안게임에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축구, 야구, 농구, 배구, 핸드볼까지 5대 구기 종목에 걸린 금메달 9개 중 한국은 전 종목 메달(금3 은2 동4개)을 가져왔으나 이번엔 이미 4종목이 탈락했고, 여자 농구는 잘해야 동메달, 여자 배구는 위태로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프로 선수들이 대거 나온 야구는 대만에 무득점하며 졌고, 그나마 남자 축구와 여자 핸드볼만 선전하는 실정이다.

남자 배구 대표팀(세계 28위)은 대회가 공식 개막하기도 전에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인도(73위)에 패한 데 이어 12강전에서 파키스탄(51위)에 0대3으로 참패했다. 한국 남자 배구가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건 1962년 자카르타 대회 이후 61년 만이다. 남자 배구는 2000년 이후 올림픽과 인연이 없고, 내년 파리 올림픽 역시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문용관 전 남자 배구 대표팀 감독은 “체격이 좋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상대로 대비했어야 했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았던 게 아쉬웠다”며 “국제 무대에 통할 만한 한국만의 전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자 농구 역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20년 넘게 올림픽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내년 파리 올림픽 예선에는 아예 불참했다. 여기에 아시안게임 참패까지 얹게 됐다.

첫 판부터 패한 한국 여자 배구대표팀.. 2023.7.2/뉴스1 ⓒ News1 이동해 기자

남자 핸드볼은 아시안게임 조별 리그에서 1승 2패에 그치며 1982 뉴델리 대회에서 핸드볼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처음 4강에 오르지 못했다. 2006년 도하 대회 4위 이후 17년 만에 ‘노 메달’. 남자 핸드볼 역시 2012년 런던 올림픽 이후 올림픽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처지다.

여자 배구(40위)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2006년 도하 대회(5위) 이후 17년 만에 아시안게임 노 메달 위기다. 조별 예선에서 그동안 한 수 아래로 여긴 베트남(39위)에 2대3으로 역전패했다. 이 1패를 안고 8강 라운드를 치르게 돼 기적 없이는 4강 진출이 어려운 상태. 2년 전 올림픽 4강 신화는 이미 빛바랜 지 오래다. 김연경·양효진 등 주축 선수들이 은퇴한 뒤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다.

구기 종목 전반에 걸쳐 장기 전략이 없다는 부분도 자주 지적된다. 일본 농구만 해도 일찌감치 2016년부터 남자와 여자 대표팀에 전부 외국인 감독을 포진시키며 체질 개선에 나서 그 효과를 보고 있다. 일본 첫 미 프로농구(NBA) 선수였던 다부세 유타(43)는 “그동안 일본 농구의 개혁은 ‘세계 무대에서 뛰고 싶다’에서 ‘세계 무대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바꾸는 데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꾸준한 노력의 결과는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여자 농구가 사상 첫 은메달, 남자 농구가 지난 9월 열린 2023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에서 유럽 강호 핀란드를 격파하는 등 3승2패를 거두며 아시아 역대 최고 순위(19위)에 48년 만에 올림픽 자력 진출권을 거머쥐기도 했다. 중국은 1승, 이란은 무승, 한국은 출전권조차 얻지 못한 대회다.

그래픽=정인성

남자 농구 대표팀 허훈은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아쉬운 게 많았다”며 “누구 하나의 책임이 아니라 모두의 책임”이라고 했다. 손대범 KBS 농구 해설위원은 “세계적 트렌드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세계 농구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원인이다. 한국 안에서 경쟁에만 급급하다 보니 밖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