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백형선

‘젠지(Gen Z)’가 하얼빈을 달군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출생 세대를 뜻하는 Z세대를 가리키는 그 단어. 그들이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존재감을 알린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를 가져온 MZ(밀레니얼 Z) 세대들이 보여줬던 그 기백이 이번 하얼빈으로 더 젊게, 더 당돌하게 재현되는 양상이다.

대회 둘째 날인 9일까지 한국이 딴 11개 금메달 중 8개가 ‘젠지’에서 나왔다. 2002~2006년생 선수들. 이들은 개인전뿐 아니라 팀 종목인 혼성 2000m 계주와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 스프린트까지 곳곳에서 금밭을 일궜다. 빙상(氷上)은 물론 설상(雪上) 종목에서도 당당하고 과감한 모습으로 세대교체 우려를 날렸다.

그래픽=백형선

쇼트트랙 세계 1위 2004년생 김길리(21·성남시청)는 2관왕을 차지하며 ‘젊은 에이스’ 입지를 다졌다. 혼성 2000m 계주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건 데 이어 여자 1500m에서도 개최국 중국 견제를 뚫고 금메달을 따냈다. 대회 직전 열린 토리노 동계유니버시아드에서 5관왕을 차지했던 그는 당초 기대했던 2연속 5관왕까진 미치지 못했지만 ‘쇼트트랙 강국’ 적통(嫡統)을 이을 후계자로서 자격을 입증했다. 대회 전 “5관왕에 오르고 싶다”고 자신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던 그는 지난 9일 3000m 여자 계주에서 막판 넘어지면서 금메달을 날리자 한동안 경기장 밖을 나오지 못했다. 언론 앞에서 서서 수차례 울먹이다가 “마지막 순간 언니들과 올라가 세리머니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넘어지는 바람에 시상식에 가지 못했다. 언니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어 “너무 아쉽지만, 앞으로 큰 대회가 남아 있기에 이번 일이 더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002년생 장성우(23·화성시청)는 ‘긍정 왕’이었다. 대표팀 고참 선배 박지원(29)과 중국 텃세와 견제에 가려 당초 주목받지 못했지만 “문제 될 것 없다. 나만 잘하면 된다”면서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까운 태도로 경기에 임해 성인 무대 국제 대회 첫 개인전 금메달을 자랑스럽게 거머쥐었다. ‘젠지’의 성공 유형을 과시했다. 누가 뭐라든 나의 길을 가면 된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2005년생 신성’ 이나현(한국체대)이 여자 100m 결승에서 ‘빙속 여제’ 김민선(26)을 0.004초 차로 제치면서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 후 대선배 김민선을 이긴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여기서 드디어 잡았다. 이제 시작이다”라며 웃었다. 당돌하면서 유쾌했다. 자신을 “앞이 창창한 선수”라고까지 소개했다. 이번 대회는 그의 첫 국제 대회, 첫 금메달이었다. 주니어 무대에서도 1등을 해보지 못했던 그는 동계 아시안게임 무대에서 2관왕에 올라 이상화-김민선으로 이어지는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여제(女帝) 후계자가 자신임을 알렸다.

프리스타일 스키 하프파이프에서는 2005년생 이승훈이 97.50점이란 압도적 점수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스키 프리스타일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 같은 종목에서 동메달을 따낸 문희성(설악고)은 2006년생이다. 이승훈은 “금메달 후보로 거론돼 부담이 있었지만, ‘어차피 이 경기는 내 것이며, 내가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마음이 통한 것 같다”고 말했다. 스노보드 슬로프스타일에서 금메달을 딴 ‘2006년생’ 이채운(수리고)은 2023년 세계선수권대회 하프파이프 우승자이기도 하다. 애초 주 종목인 하프파이프에만 참가 신청했다가 대회 직전 슬로프스타일을 추가했다. 즉흥적 결정이었지만 나름 자신이 있었고, ‘실패해도 그만’이란 가벼운 긴장감이 우승 밑거름이 됐다. 이 종목 동메달리스트 강동훈(고림고)도 2006년생이다. 그는 10일 남자 빅에어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얼빈에서 날아오른 ‘젠지’들 시선은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을 향하고 있다. 진정한 시험대는 내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