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피날레였다. 20년 넘게 한국 여자 배구를 이끌었던 여제 김연경(37·흥국생명)이 우승 트로피와 함께 뜻깊은 은퇴식을 치렀다. 8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끝난 프로 배구 V리그 여자부 챔피언 결정전 최종 5차전. 김연경을 앞세운 정규 리그 1위 팀 흥국생명이 정관장을 세트 점수 3대2(26-24 26-24 24-26 23-25 15-13)로 제압하고 정상에 올랐다.
흥국생명은 5전 3선승제 시리즈에서 1·2차전을 연달아 이겨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도 원정 3·4차전을 내주며 흔들렸다. 홈으로 돌아온 5차전에 김연경이 34득점을 몰아치며 끝내 우승에 도달했다. 흥국생명은 2018-2019 시즌 이후 6년 만에 챔피언 결정전에서 이겨 여자 배구 최초 5회 우승을 이뤘다. 김연경은 해외 진출 전이던 2008-2009시즌 이후 16년 만에 V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김연경은 챔피언 결정전 5경기 133득점으로 시리즈 MVP(최우수 선수)에 뽑혔다. 기자단 투표에서 역대 두 번째 만장일치(31표)였다.
정관장도 끝까지 끈질겼다. 1~2세트를 내리 내줘 패색이 짙던 상황에서 3~4세트를 따내 동률을 이뤘고, 5세트에도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였다. 이번 챔피언 결정전은 5경기 중 4경기에서 풀세트 접전이 벌어졌고, 마지막 5차전은 전 세트가 2점 차로 승부가 날 정도로 박빙이었다.
이날로 김연경은 21년 프로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2005년 V리그 신인 선발 전체 1순위로 흥국생명에서 데뷔한 이후 선수 생활을 끝내는 마지막까지 한국 배구를 대표하는 세계적 아이콘으로 활약했다. 해외에서 선수 생활을 하느라 한국 리그에서 9시즌만 뛰고도 정규 리그 통산 득점 순위 9위(5314점)에 올랐다. 포스트 시즌 득점까지 합치면 역대 4위(6359점). 포스트시즌에서만 1045점으로 역대 유일하게 1000점 이상을 기록했다. V리그에서만 정규 리그 4회, 챔피언 결정전 4회 우승을 이뤘다. 일본 리그 2회, 튀르키예 리그 2회, 중국 리그에서도 한 차례 정상에 올랐다. 튀르키예 페네르바체 시절이던 2012년엔 유럽 챔피언스리그 트로피까지 들었다.
17년간 국가대표로도 활약하며 한국 여자 배구 중흥기를 주도했다. 2005년부터 2021년까지 태극 마크를 달고 271경기에서 4981점을 올렸다. 올림픽에 세 차례(2012·2016·2020) 출전해 2012 런던과 2020 도쿄 대회에서 두 차례 한국 4강 진출을 이끌었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도쿄 올림픽을 끝으로 태극 마크를 반납했다.
김연경은 키 192cm 장신에서 나오는 공격력에다 수비 능력도 좋아 세계 정상급 선수로 평가받았다. 고교 입학 전까지 키가 작아 세터나 리베로 포지션에서 뛰었던 덕이다. 고교 시절 이미 ‘완성형 선수’였던 그를 지명하기 위해 흥국생명과 GS칼텍스가 일부러 꼴찌를 하려고 경쟁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김연경은 데뷔 시즌부터 신인왕·정규 리그 MVP(최우수 선수)·챔피언 결정전 MVP를 모두 쓸어 담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배구 여제’ 탄생을 알렸다. 남녀 통틀어 한국 프로 배구에서 처음 해외에 진출했고, V리그 역대 최다 정규 리그 MVP(6회)와 최다 챔피언 결정전 MVP(4회) 주인공이기도 하다.
14일 예정된 V리그 시상식에서도 MVP 수상이 유력하다. 정규 리그 MVP 수상을 7회로 늘릴 수 있다. 현역 마지막 시즌까지 정규 시즌에서 국내 선수 중 가장 많은 585득점으로 전체 7위에 오르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보였다. 공격 성공률(46.03%·전체 2위), 후위 공격(43.97%·전체 3위) 등 여러 공격 지표에서 국내 선수 최고 기록을 올렸다.
이날 ‘배구 여제’ 마지막 경기를 보러 온 배구 팬 6082명이 관중석을 가득 메웠다. 곳곳에 ‘함께해서 행복했어’ ‘영원히 김연경’ 등 김연경을 응원하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김연경이 우승 후 동료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눈 뒤 관중석을 향해 인사를 할 땐 그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체육관을 울렸다. 김연경은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이 안 난다. 좋은 모습으로 많은 분 앞에서 마무리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이보다 행복한 은퇴가 어디 있겠느냐”며 “정관장 선수들도 좋은 배구 보여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이어 “많이 응원해 주셔서 힘내서 우승할 수 있었다”며 “나는 이제 떠나지만 후배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 흥국생명 팀과 배구에 관심 가져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