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플레이션의 파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나라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미국, 유럽에 비해 유독 낮게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물가 산정에 왜곡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거비 부담, 기름 값 상승 반영 부족, 배달료 등 신종 서비스 가격 반영 미흡 등이 논란거리다.
우리나라는 에너지를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식량 자급률이 낮다. 하지만 3월 국내 소비자 물가 상승률(전년 동월 대비)은 4.1%로, 8.5%인 미국과 비교해 상승 폭이 절반도 안 된다. 올 들어 1, 2월에도 각각 3.6%, 3.7%로 7.5%, 7.9%였던 미국보다 크게 낮았다.
2월 물가상승률로 비교하면 우리나라(3.7%)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38국 가운데 서른둘째였다. OECD 평균(7.7%)의 절반 이하이고, 만성적인 저물가국인 영국(5.5%), 독일(5.1%)보다도 낮다. 물가 산정 방식이 실제 물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일종의 ‘착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가주거비가 빠져 있다
전문가들은 통계청이 자가주거비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 물가가 실제보다 낮게 나온다고 입을 모은다. 자가주거비란 본인 소유 집에 살면서 발생하는 각종 비용을 말한다. 주택담보대출 이자, 세를 줬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임대료 수익, 재산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 유지·관리비 등을 말한다.
우리나라 주거비는 소비자 물가의 9.83%를 차지하는 집세 항목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에는 자가주거비는 없이 전·월세 등락만 반영된다. 반면, 주요국들은 자가주거비와 주택임차료를 합친 주거비를 높은 비율로 반영한다. 미국이 32%로 높고, 영국(26%), 네덜란드(24%), 독일(21%) 등도 20%를 넘는다.
작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이주열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소비자 물가에서) 자가주거비를 빼놓고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지적에 공감한다”고 했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자가주거비를 제대로 반영하면 소비자 물가가 2%포인트씩은 높아질 것”이라며 “의식주에서 주(住)가 빠져 있다 보니 통계에 불신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높은 유류세가 유가 상승률 감춘다
최근 세계 경제를 휩쓸고 있는 인플레이션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국제 유가 등 에너지 가격이 치솟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하지만 국내 에너지 가격은 유류세 때문에 왜곡이 벌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3월 휘발유 가격은 국내에서 27.4%, 미국에서 48% 올랐다. 미국은 산유국인데도 상승률이 한국보다 높다.
미국은 기름 값에서 세금의 비율이 낮지만, 우리나라는 휘발유는 56%, 경유는 47%가 세금이다. 고정비용 격인 세금 비율이 워낙 높아서 국제 유가 변화에 연동되는 나머지 부분의 가격이 바뀌더라도 전체 기름 값 변동 폭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공공요금 인상 억제도 원인
전기요금과 도시가스 요금 등 공공요금 인상을 정부가 억제하고 있는 것도 물가 상승률이 낮은 원인 가운데 하나다. 전기요금의 경우 2013년부터 9년간 동결되다가 이달 들어 소폭 올렸다.
코로나 사태 이후 배달료가 부쩍 올라 불만이 가중되고 있지만 소비자 물가에 배달료 항목이 아예 없다. 한은 관계자는 “외식비에 배달료가 일부 포함되지만 간접적으로 미미하게 반영된다”고 말했다. 택시 호출 수수료도 물가 산정에서 빠져 있다.
◇무상교육도 저물가에 영향
우리나라는 초·중등학교에서 무상교육과 무상급식을 실시하기 때문에 물가 상승률이 낮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에서는 교육비와 급식비를 가계가 부담하고 있다. 또 미국 등은 경기 회복이 빨라 임금 인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그런 모습이 없다는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천소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코로나 이후 미국에서는 노동 시장에 복귀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 구인난에 따른 임금 상승이 두드러진다”며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현상이 없어 양국 물가 상승률에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