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타카르 지방에서 한 젊은 여성이 총에 맞아 피범벅이 된 채 길바닥에 숨져 있는 사진이 온라인에 공개됐다. 시신을 부모가 끌어안고 있었다. 숨진 여성은 이슬람 전통 복장인 부르카를 입지 않고 외출했다는 이유로 탈레반이 현장에서 사살했다고 미국 폭스뉴스가 보도했다. 이날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슬람 율법이 보장하는 범위에서 여성 인권을 최대한 존중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런 발표가 나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부르카를 안 입었다고 여성이 살해된 것이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다시 통치하게 되면서 여성 인권이 암흑기로 빠져들고 있다. 특히 여성 억압을 상징하는 부르카를 입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카불의 한 젊은 여성은 CNN에 “나랑 여동생, 어머니까지 세 모녀가 사용할 부르카가 한두 개밖에 없다”며 “부르카를 더 손에 넣지 못하면 침대 시트라도 뜯어 만들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탈레반 치하에서 목숨 부지를 위해 서둘러 부르카를 장만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부르카 가격은 10배까지 폭등하고 있다고 인디아투데이가 보도했다. 현지인들은 탈레반을 두려워하는 상점 주인들이 가게 문을 열지 않거나 일찍 닫는 바람에 부르카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했다.
탈레반은 여성의 사회 활동을 철저히 배격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이다. 이들은 첫 통치 기간(1996~2001년) 동안 여성의 권리를 짓밟았다. 모든 여학교가 폐쇄됐고, 여성들은 어떠한 형태의 교육도 받지 못하게 했다.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남성을 동반하지 않으면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온종일 부르카 착용이 의무였다. 이런 원리주의 이슬람 규정에 반발하면 처벌과 구타가 일상이었다. 목숨을 잃는 일도 다반사다.
미군이 점령한 지난 20년 부르카 착용 의무가 사라지고 학교 교육을 받았던 아프간 여성들은 미군 철수 이후 순식간에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탈레반의 잔악한 여성 탄압은 미군 철수 이후인 지난달 45세 여성을 때려 죽인 사건을 통해 재확인됐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아프간 북부 파리야브 지방의 한 가정집에 탈레반 전사 15명이 사흘 연속 찾아와 밥을 해달라고 요구해 먹었다. 나흘째 되는 날 이 여성이 “가난한 내가 어떻게 밥을 더 해줄 수 있겠냐”고 하자, 탈레반 대원들은 AK47 소총으로 이 여성을 마구 때려 숨지게 했다. 이 여성의 4남매가 이 장면을 지켜봤다. 큰딸이 어머니를 구타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국제사회에서 심각한 여성 인권유린을 우려하자 탈레반도 17일 기자회견을 열어 “여성들이 학교 수업을 받고 취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여성의 권리를 존중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슬람 율법의 한도에서”라는 조건을 달았다. 툭하면 이슬람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며 가혹하게 억압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프간 여성들은 불신을 표시하고 있다.
탈레반은 부르카를 의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는 등 어느 수준에서 여성의 권리를 인정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미 아프간에서는 여성이 남성 친·인척 없이 혼자 외출하지 않고 있다고 외신들이 전하고 있다. 트위터에서는 카불 시내에서 얼굴을 드러낸 여성을 그린 대형 벽화를 흰 페인트로 지우는 남성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1만7000회 이상 리트윗(사진 공유)되며 눈길을 모았다.
탈레반은 학식 있는 여성을 증오하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서둘러 학위를 감추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탈레반은 17일 아프간 국영방송의 유명 앵커인 카디자 아민을 비롯한 여성 직원들에 대해 무기한 정직 처분을 내렸다. 서부 헤라트 지방에서는 무장 탈레반 전사들이 대학 정문을 지키며 여학생들의 캠퍼스 출입을 막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여자 축구 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하다 2016년 덴마크로 망명한 칼리다 포팔(34)은 BBC 인터뷰에서 “고국에 남겨진 여자 축구 선수들의 목숨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고 말했다. 포팔은 ‘여자가 축구를 한다’는 이유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살해 위협을 받은 끝에 해외로 도피했다. 포팔은 아프간 여성 축구 대표팀의 트위터 계정을 없앴으며, 고국에 남아 있는 옛 동료 선수들에게 각자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닫으라고 권하고 있다고 했다.
2012년 탈레반의 총격을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 남았던 파키스탄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24)는 “이제 아프간 여성들은 학교 수업을 듣지 못하고 책을 읽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절망에 빠져 있다”며 “아프간의 자매들이 걱정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