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산 수입품 관세율을 26%로 높이는 상호 관세 부과 행정명령에 2일 서명했다. 트럼프는 이날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이라 이름 붙인 행사를 열고 사실상 모든 교역국에 추가 관세를 부과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트럼프가 서명한 행정명령에 따르면, 미국은 5일부터 거의 모든 수입품에 관세 10%를 물리고 한국 등 57국엔 9일부터 추가 상호 관세를 부과한다. 이에 따라 미국에 수출하는 한국산 상품엔 5일부터 10%, 9일부터는 여기에 16%포인트를 더한 관세율 26%가 적용된다. 추가 관세 부과 대상국은 ‘미국이 큰 무역 적자를 기록 중인 국가들’이라고 백악관은 설명했다.
한국에 대한 상호 관세율은 미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20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트럼프는 그동안 교역 상대국의 관세·비관세 무역 장벽을 분석해 이에 상응하는 상호 관세 수준을 정할 예정이라고 밝혀 왔다. 하지만 이날 미 무역대표부(USTR)가 공개한 상호 관세 산식을 보면 해당국에 대한 미국의 지난해 무역 적자(수출액-수입액)를 수입액으로 나눈 임의의 수치만 기준으로 삼았다.
이번 상호 관세 부과는 미 의회 승인 절차 없이, 트럼프 한 사람의 뜻에 따라 단행했다.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규칙에 기반한 자유무역 시대가 갑자기 막을 내렸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이날 오전·오후 두 차례에 걸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경제 안보 전략 태스크포스(TF)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관세율 주먹구구식 계산… ‘트럼프는 25%, 문서엔 26%’도 논란
트럼프는 상호 관세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대규모 무역 적자’를 국가·국민의 경제적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지목하고 상호 관세를 통해 바로잡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경제성장률·실업률 등 미국의 경제지표가 다른 주요국보다 호조를 보이는 가운데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강행한 상호 관세가 각국의 보복 관세를 유발해 미국과 세계 경제를 끌어내릴 우려가 있다고 경고한다.
트럼프는 연설에서 한국이 자동차의 81%를 자국에서 생산하고, 미국산 쌀에 물량에 따라 최고 500% 이상 관세를 부과한 것을 언급하며 “어떤 경우는 적국보다 우방이 더 나쁘게 우리를 대우했다”고 했다. 한국·일본 등을 지목하며 “모든 비금전적(비관세) 무역 제한이 최악인 나라들”이라고 했다. 성조기를 배경으로 연설한 트럼프는 추가 상호 관세 부과 대상을 적은 큰 차트를 들어 보이면서 “우방·적국 할 것 없이 이 나라들은 미국 제품에 막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우리 산업을 파괴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비금전적 장벽을 만들었다”고도 했다.
차트엔 미국에 대해 각국이 부과하는 관세 수준이 ‘환율 조작 및 무역 장벽 포함‘이라는 설명과 함께 나열됐다. 그 옆엔 ‘미국이 할인해서(discounted) 부과할 상호 관세‘라며 미국이 주장하는 상대국 관세의 절반 수준인 관세율을 적어 넣었다. ‘미국산 수출품이 이렇게 높은 관세에 시달리고 있는데, 상대 국가엔 관대하게 절반 정도만 매기겠다‘는 의미였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가지고 나온 차트에 적시된 한국의 대미(對美) 관세는 50%, 이에 따라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겠다는 상호 관세는 25%였다. 이날 트럼프의 차트에 적힌 한국 관세율은 행정명령에 적시된 공식 관세율(26%)과 달라 혼란이 일었는데, 백악관 대변인실은 본지 질의에 “행정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USTR이 공개한 상호 관세 계산법은 실제 관세, 심지어 비관세 무역 장벽과도 무관했다. 단순히 무역수지 적자액을 미국의 해당국 상품 수입액으로 나누어 ‘이것이 이 나라 관세율‘이라고 주장했다. 무역수지 적자 폭이 줄면 관세율이 낮아지는 계산 방식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난해 무역 적자액은 약 660억달러, 미국의 한국 상품 수입액은 1315억달러였는데 이를 나누면 약 50%가 나온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트럼프 정부가 상호 관세 계산에 쓴) 이런 방식은 세계무역기구(WTO)의 관세 계산법과는 전혀 맞지 않는 개념이고 ‘관세’ 근거가 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하다.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 ‘공식’으로 산정해 트럼프가 들어 보인 차트에 적시한 한국 외 국가의 상호 관세율은 중국 34%, 유럽연합(EU) 20%, 베트남 46%, 대만 32%, 일본 24%, 인도 26% 등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일 스콧 베선트 재무 장관이 전날 의회에 “상호 관세율은 일종의 상한선이며 추후 협상 과정에서 낮아질 수 있다”고 보고했다고 전했다. 미국산 수입량 확대, 무역 장벽 제거 같은 조치로 상호 관세 조치가 완화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일단 높은 상호 관세를 부과한 다음, 교역 상대국이 미국에 대한 무역 장벽을 얼마나 없애는지 보고 관세를 인하해 주겠다는 의미다. 미국은 그동안 한국에 대해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 제한,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 500% 넘는 쌀 수입 관세 등을 ‘불공정 무역 관행‘으로 지목해 왔다.
산업부에 따르면, 한국은 2007년 한미 FTA 체결 이후 상품 대부분을 무관세로 교역하고 있고, 미국에서 수입하는 품목에 실제로 부과하는 평균 관세율은 지난해 기준 약 0.79%다. 다만 백악관의 자의적 산식대로라면 한국이 대미 무역 흑자 규모를 줄여야 상호 관세를 낮출 수 있어, 한국으로서는 미국과 벌일 양자(兩者) 협상이 중요해질 전망이다. 베선트는 이날 폭스뉴스에 출연해 “모든 국가에 보내는 충고는 ‘보복에 나서지 말라’는 것”이라며 “보복 조치를 한다면 상황이 더 악화하겠지만, 보복 조치가 없다면 (관세가) 더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상호 관세·국제긴급경제권한법
상호 관세(reciprocal tariffs): 트럼프가 말하는 상호 관세는 교역 상대국이 미국산 수입품에 대해 부과하는 관세·비관세 무역 장벽에 상응해 미국의 수입 관세를 높이는 조치를 뜻한다.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 미국의 안보·외교·경제에 위협이 되는 비상사태 때 대통령에게 무역 등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 권한을 부여한 법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