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6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드립니다.]

2012년 초여름의 일입니다. 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가 워싱턴 DC를 방문하고 돌아왔기에 오바마 미 행정부의 기류를 파악하고자 그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미국만 다녀오면 한미 동맹 깨버리고 싶다. 비핵화, 원자력 문제에서 우리에게만 너무 심하게 군다”고 했습니다.

그는 “미사일, 원자력 협정 등 미국과의 협상에서 전혀 진전이 없다. 오바마 정부는 도대체 우리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며 “과연 ‘미국이 동맹국 맞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외교안보 분야를 취재하면서 정부 관계자로부터 미국에 대한 불만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이렇게 강한 비판은 처음이었습니다.

2009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태권도 시범을 따라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주창한 핵 안보 정상회의가 2012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되도록 배려할 정도로 이 대통령과 관계가 좋았으나 미사일 협정 개정에 대해선 완강한 모습을 보였다. /연합뉴스
2009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태권도 시범을 따라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주창한 핵 안보 정상회의가 2012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되도록 배려할 정도로 이 대통령과 관계가 좋았으나 미사일 협정 개정에 대해선 완강한 모습을 보였다. /연합뉴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 노무현 진보 정권 시절 해결하지 못한 한미동맹의 여러 현안을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는데도 한·미 미사일 협정과 원자력 협정은 시대에 뒤처져 있다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정부 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한·미 동맹 깨 버리고 싶다”고 한 고위 관계자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협상장에서 뛰쳐나오고 싶었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 표면적으로는 한미 관계 황금기

2012년은 표면적으로 볼 때 한미 관계가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2008년 11월 대한민국을 비자 면제 프로그램(Visa Waiver Program·VWP) 대상국으로 지정, 한국 국민이 비자 없이 최대 90일간 미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2008년, 2009년 출범한 이명박, 오바마 정부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2009년 6월 ‘한미 동맹 미래 비전’ 채택,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 2012년 3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거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는 듯했습니다.

특히 오바마가 자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개최한 핵 안보 정상회의를 워싱턴 DC에 이어 서울에서 개최되도록 배려한 것은 전 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2012년 3월 26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열린 제2차 핵 안보 정상회의는 참가국이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의 두 배로 한국에서 열린 정상회의 중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로 기록됐습니다.

오바마는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뛰어난 교육열과 교육 시스템을 미국이 배워야 한다고 언급하는 등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한국은 미사일 협정, 원자력 협정에서 주변국 상황을 반영한 미국의 배려를 기대했으나 미국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 냉랭했습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012년 12월 12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장거리 로켓 은하3호를 발사했다고 보도했다./AP=연합뉴스

◇한국 1인당 GDP 1700달러 때 맺은 협정

2012년 당시 한국의 미사일 개발 문제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중요한 현안으로 부각되었습니다. 1979년 맺어진 후 33년간 유지돼 온 ‘한·미 미사일 지침’은 달라진 한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미국이 한국의 미사일 개발을 제한한 것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노재현 당시 한국 국방부 장관은 존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두 달 전 위컴 사령관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미국은 위컴 명의의 서한에서 “한국이 개발하는 미사일은 사거리 180㎞ 이내, 탄두 중량 500㎏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고 우리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주한 미군 철수도 고려하고 있었던 지미 카터 미 행정부는 1978년 우리가 첫 국산 탄도미사일인 ‘백곰’ 시험 발사에 성공하자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제한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노 장관은 미국의 요구대로 “한국이 개발하는 미사일은 결코 사거리 180㎞를 초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미사일 개발을 제한하는 ‘지침’의 시작입니다.

그때 1인당 GDP가 약 1700달러에 불과했던 한국 정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한국은 1970년대 초부터 ‘자주 국방’을 내걸고 자체 미사일 개발에 착수했지만 미국으로부터 핵심 부품과 기술을 제공받지 않으면 미사일 개발을 완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카터 미 대통령이 추진한 주한 미군의 감축 계획의 여파로 나라 전체가 ‘안보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은 2001년 1차 개정에 의해 사거리가 300㎞로 늘어났습니다. ‘트레이드 오프’ 방식이 적용돼 사거리가 500km가 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탄두 중량은 300kg으로 축소됩니다.

이는 한반도 주변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중국·러시아는 이미 사거리 수천㎞의 장거리 미사일(ICBM)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북한도 사거리 1300㎞의 노동미사일을 실전 배치했고, 10년 넘게 대포동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한국 위상 고려 안 해

한국의 군사적, 경제적 위상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한국은 2011년 국내총생산이 1237조원으로, 1979년에 비해 38배 성장했습니다. 수출도 같은 기간에 150억달러에서 5552억달러로 30배 이상 올랐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보유한 나라로 발돋움했고, 미국·유럽연합(EU) 등과 대등한 위치에서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관련, 한국과 미국의 입장을 비교한 조선일보 2012년 7월 16일자 그래픽. 오른쪽 사진은 1999년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33년 전의 ‘지침’을 2012년에도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한국이 선진국 수준의 미사일 개발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일일이 미국의 허가를 받는 것은 한국의 국가적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 민간 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동북아의 안보 상황이 불안정하게 진행될 경우, 주변 국가와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의 사거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는 유사시 우리가 남해안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 북한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사거리가 최소한 1000㎞ 이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바마, 한국 좋아한다면서도 냉담

한미는 2011년 1월 미사일 지침 개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으나 미국의 완강한 태도로 1년 넘게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미국 일각에서는 탄두 중량을 그대로 둔채 사거리만 500km로 늘리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과 관련한 양국의 입장 차이가 뚜렷이 부각된 것은 2012년 3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였습니다. 핵 안보 정상 회의를 계기로 서울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미사일 지침과 관련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간에 실무적으로 검토되고 있고, 합당한 합의가 이뤄져 곧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을 피력한 겁니다. 이 대통령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도 “우리가 미사일 사거리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유사시 북한의 공격에 대해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는 이날 회견에서 이 대통령을 ‘베스트 프렌드(절친한 친구)’로 부르며 다른 사안에서 대해선 공감을 표시했지만, 미사일 문제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오바마는 “(미사일 지침은) 특정한 무기 체계나 미사일 사거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국민을 어떻게 보호하느냐, 동맹의 목적 달성을 확실히 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이 발언은 한국이 미사일 사거리를 늘리지 않는 선에서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이는 미사일 협상이 더욱 난항을 겪을 것임을 예고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