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이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신실크로드) 사업에 투자하겠다며 2017년 7월 중국 HNA(하이난항공)그룹에 1억3350만달러(약 1900억원)를 송금했다가 그대로 떼인 것으로 감사원 감사 결과 드러났다. 산은은 2021년 HNA그룹이 파산하자 투자금을 회계상 전액 손실 처리했지만, 실제로는 2017년에 투자금을 한꺼번에 송금하고서 곧바로 투자금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지금은 투자금이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간 100조원 가까운 정책 자금을 공급하는 국책은행이 중국 기업에 사실상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도 산은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사고를 불문에 부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사고 발생 시점으로부터 오랜 시일이 지나고 관련자 대다수가 퇴직해, 산은이 사기를 당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 임직원이 중국 측과 짜고 돈을 빼돌린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는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7일 감사원에 따르면, 산은은 2016년 7월 HNA그룹과 특수 관계라고 주장하는 IAP라는 회사로부터 HNA그룹이 추진하는 하이난성 하이커우시 메이란 국제공항 확장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산은은 그해 10월 법률 자문사, 회계법인과 함께 현장 실사를 하고, 프로젝트 참여 여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中에 사실상 사기당한 산은, 누구에게도 책임 안 물었다

이듬해 1월 회계법인은 공항을 운영하는 메이란국제공항공사가 HNA그룹에 빌려준 돈만 12억8000만 위안(약 2600억원)에 달하는 등 메이란국제공항공사의 익스포저(위험 노출액)가 67억9000만 위안(약 1조3600억원)이라는 내용의 재무 실사 보고서를 산은에 제출했다.

그럼에도 산은은 IAP와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산은은 ‘KDB-IAP 일대일로 사모투자합작회사’라는 이름으로 8900만달러(약 13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고, 이 펀드는 투자금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설립하는 특수목적법인(SPC)에 출자하기로 했다. 산은은 출자와 별도로 SPC에 4450만달러(약 600억원)도 대출해주기로 했다. SPC가 출자금과 대출금을 합한 1억3350만달러를 다시 ‘HNA 파이낸스 II’라는 펀드에 출자하고, HNA그룹의 중간 지주회사도 같은 펀드에 1억3350만달러를 출자하면, 펀드가 이를 메이란공항공사에 대출해주는 방식으로 프로젝트 투자가 이뤄질 예정이었다. 즉 산은과 국내 투자자의 자금은 ① IAP와의 합작 펀드와 ② 버진아일랜드 SPC, ③ HNA 파이낸스 II 펀드라는 세 단계를 거쳐서 프로젝트에 들어가게 돼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HNA 파이낸스 II 펀드의 의결권 전부가 HNA그룹의 중간 지주회사에 주어지기로 돼 있어, 한국 측 투자금이 일단 중국 측으로 넘어가면 한국 측이 아무 통제를 할 수 없는 구조였다는 점이다. 애초에 산은과 IAP가 함께 조성한 ‘일대일로 사모펀드’에 IAP가 댄 돈도 50만달러(약 7억원)에 불과했고, IAP는 사실상 1인 회사였다. 그런데도 산은은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는 계약을 중국 측과 체결했다.

2017년 6월에는 중국 은행감독관리위원회가 중국 은행들에 HNA그룹의 부채 상황을 조사하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HNA그룹의 부채가 과도해 신용 등급이 강등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산은은 ‘HNA그룹의 신용 등급에는 문제가 없으며 프로젝트는 HNA그룹의 리스크와 무관하다’는 내용의 내부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산은은 7월 3일 메이란 프로젝트 투자를 최종 결정하고, 7월 13~14일 투자금·대출금 1억3350만달러 전액을 IAP와의 합작 펀드 계좌에 입금했다.

이 돈은 계획대로라면 SPC를 거쳐서 HNA 파이낸스 II 펀드로 가야 했다. 그러나 중국 측은 돈을 곧바로 홍콩에 있는 HNA 파이낸스 II 펀드 계좌로 보낼 것을 요구했고, 7월 14일 해당 계좌로 돈이 넘어갔다.

중국 측 통제하에 들어간 한국 측 돈은 나흘 뒤 메이란공항공사에 대출됐다. 그러나 이 돈은 그 뒤로 한 번도 프로젝트에 투입되지 않았다. 산은 측이 투자 집행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중국 측이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메이란공항공사는 2020년 4월 이자 지급을 중단했고, 2021년 1월에는 HNA그룹이 파산해버렸다. 중국 법원의 결정에 따라 한국 측은 HNA그룹과 메이란공항공사 등의 자산을 매각해 나온 대금에서 단 0.3%만을 배당받게 됐다. 산은은 자금 회수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해, 출자금과 대출금 전액을 손실 처리했다. 산은이 잃은 정책 자금은 6134만달러(약 900억원)에 달했다. 산은이 끌어들인 국내 투자자들도 손실을 입었다.

산은의 메이란 프로젝트 투자는 2016년 2월부터 2017년 9월까지 재임한 이동걸 전 회장 때 이뤄졌다. 동명이인인 후임 이동걸 전 회장 때인 2021년 7월에는 산은 검사부가 이 프로젝트에 문제가 없었는지 감사했다. 그러나 검사부는 프로젝트 투자 결정 과정의 문제점은 들여다보지 않은 채, ‘손실은 코로나에 따른 메이란공항공사의 영업 부진과 HNA그룹의 파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관계자들을 문책하지 않았다.

감사원은 산은에 앞으로 해외 투자 시 리스크 검토에 유의하라며 주의를 줬다. 산은 관계자는 “2021년에 이미 손실 처리가 끝난 사건”이라며 “당시 투자를 담당했던 실무자들이 다 퇴직해서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