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6일 EU(유럽연합) 28개 회원국에서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를 합친 세력이 40년 만에 처음으로 과반에 미달할 것으로 나타났다. 대신 반(反)이민을 내세운 극우 포퓰리스트 세력이 4분의 1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며 대약진했고, 좌파 진영에선 환경에 대한 관심을 발판으로 녹색당이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렸다. 이는 각국에서 선거가 끝난 뒤 집계한 출구조사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유럽 통합 추진의 기둥 역할을 해온 중도 세력의 힘이 빠지면서 유럽 정치 지형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빅4 중 英·佛·伊에서 극우 정당 1위
27일 오후 11시 기준(한국 시각)으로 유럽의회가 각국 개표 상황을 집계한 결과, 프랑스·영국·독일·이탈리아 등 '유럽 빅4' 중에서 독일만 제외하고 나머지 세 나라에서 모두 극우 정당이 1위를 차지했다. 개표를 마친 프랑스에서는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이 23.3%를 얻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우파 정당 LREM(22.4%)을 눌렀다. 마크롱은 선거 직전 "패배를 생각해본 적 없다"고 했지만 극우 열풍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출구 조사 결과 난민 배척에 앞장서 온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가 이끄는 극우 동맹당이 34.3%로 1위,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이 17.1%로 중도좌파 민주당(22.7%)에 이어 3위에 오를 것으로 나타났다. 동맹당은 작년 3월 총선에서 17.4%를 득표했지만 이번에는 2배로 득표율을 끌어올렸다.
영국에서도 극우 인사 나이절 패라지가 지난 2월 창당한 브렉시트당이 31.7%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할 것으로 나타났다. 우파 성향 자민당이 18.6%로 2위, 노동당(14.1%)은 3위로 밀렸다. 집권 보수당(8.7%)은 5위로 떨어지는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 전망이다.
그러나 독일은 개표를 마친 결과 집권 중도우파인 기민·기사당 연합(28.9%)이 1위를 차지해 체면치레를 했다. 독일에서는 원내 5당인 녹색당(20.5%)이 2위로 올라서며 156년 전통의 사민당(15.8%)을 누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중도파 과점 체제 40년 만에 붕괴
극우 돌풍이 두드러지면서 유럽의회는 지각 변동을 겪게 됐다. 유럽의회 선거는 전체 751석을 인구 비율별로 각국에 할당한 다음 정당별 득표율에 따라 당선자를 정하는 비례대표 방식으로 치러진다. 각 정당은 당선자들을 유럽의회 내 성향별 8개 정치그룹에 소속시킨다.
27일 오후 11시(한국 시각) 기준 중간 예측 결과, 중도우파 유럽국민당그룹은 180석을 확보할 것으로 나타나 1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기존 221석에서 41석이나 줄어든 결과다. 중도좌파 사민당그룹은 191석에서 145석으로 줄어들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국가자유주의그룹(ENF)' 등 3개 극우 정치그룹은 기존 118석에서 171석으로 크게 세력을 불릴 것으로 나타났다. 이 3개 그룹은 조만간 통합을 논의할 예정이다. 좌파에서는 녹색당그룹이 50석에서 69석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중도우파·중도좌파 세력의 40년 과점 체제가 무너져, 유럽의회의 격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FT는 "중도파의 시대가 종말을 맞고 극우부터 극좌까지 다극화의 시대를 맞게 됐다"고 전했다.
이번 선거 결과로 EU도 변화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회는 EU의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법안을 거부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 이민 정책은 물론이고 농수산·사법·환경 등 유럽 전체에 적용되는 규제에 극우 세력의 입김이 거세질 전망이다. 특히 반난민 기조가 뚜렷해지고, EU 통합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극우 세력은 EU 자체를 부정하거나 각국의 자율을 중시한다. 영국 가디언은 "극우 정당과 녹색당이라는 좌우 양극단의 힘이 강해지면서 유럽 내에서 의견을 통합하는 것이 훨씬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럽의회
유럽연합(EU)에서 행정부 역할을 하는 유럽위원회가 제출한 법안을 심의해 법을 제정하는 기구다. 의원은 총 751명이며 의원 임기는 5년이다. 의석은 인구 비율에 따라 EU 회원국 각국에 할당된다. 개별 국가 의회처럼 법안을 독자적으로 발의하진 않지만, 환경·노동·정보보호·난민 등 EU 회원국에 공통 적용되는 법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