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당수 사람이 ‘최근 정치 불안이 커서 경제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라고 입에 올리고 내린다지?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별안간에 예측도 못 했던 중대한 정치 사안이 생겨도 우리나라는 수습이 빨라. 우리는 가장 리얼리티(현실)를 걷는 기업가들이니까 불안 요소 때문에 괜히 우리까지 들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우리가 ‘정치가 불안할수록 경제까지 망가지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경제가 나빠지지 않는다는 거야.”
정치 혼란이 이어지던 1980년대 중반, 당시 선경그룹을 이끌던 고(故) 최종현 회장이 임원·부장 대상 신년 간담회에서 했던 육성(肉聲) 녹음의 일부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해 수장고에 잠들어 있던 자료를 SK가 첨단 기술로 복원해낸 것이다.
SK그룹은 고 최종현 선대회장의 경영 활동 일체가 담긴 문서·사진·카세트테이프 등 13만여 건의 기록을 디지털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2일 밝혔다. 여기엔 최 회장이 1973년부터 1998년까지 25년간 선경을 이끌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SK의 역사를 넘어 근현대 경제사를 연구하는 중요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은 SK 창업주 최종건 회장의 동생이자, 최태원 현 회장의 아버지다. SK는 여기에 ‘선경실록(鮮京實錄)‘이란 이름을 붙였다.
◇최종현 회장 육성 등 13만건 복원
SK가 첨단 기술을 토대로 복원한 이 자료에는 1970~1990년대 최 선대회장이 임직원과 가졌던 각종 회의, 중요 의사 결정 순간에 벌인 토론과 판단, 그룹 총수들과의 대화, 김치 보관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육성 녹음이 담겼다. 일반적으로 특정 기업이 총수의 대화를 이렇게 일일이 녹음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SK는 “회사 고유의 기록 문화 덕분에 이런 내용들이 파기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라며 “음성 카세트테이프만 총 3530개로 하루 8시간을 연속해 들어도 1년 넘게 걸리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했다.
카세트테이프, 플로피디스크 등 기록 매체 사업을 했던 SK답게 당시는 물론 지금도 주요 회의는 모두 녹음·녹화해 보존하고, 사내 방송 등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번 복원 작업에 참여한 SK 관계자는 “한국 역동기를 이끈 기업가들의 고민과 철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보물과 같은 자료”라며 “양이 매우 많고 오래돼 복원이 쉽지 않았지만, 첨단 기술을 통해 품질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복원 자료에는 최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1982년 신입 사원 교육 녹음에는, “사람 뽑을 때 먼저 혈연을 찾고, 그다음 학연, 지연에 인연까지 찾는 게 우리나라의 문제다. 미국 가면 외국 사람도 다 쓰는 판인데 요 땅덩어리에서 어느 지역, 어느 지역 가리면 뭐 가지고 생활을 하자는 얘기냐”며 한국의 ‘관계 지상주의‘를 깨자고 강조하는 내용이 담겼다.
노사 관계에 있어선 “우린 한솥밥을 먹는 식구다. 식구끼리 싸우면 집안이 어찌 되겠는가. 싸움은 밖에서 다른 경쟁 업체와 해야 한다”던 그의 뜻이 육성으로 남았다. 또 “머리보다 패기가 더 중요하다”며 “일을 보고 어떤 일이든 도망 다니지 말아요. 일을 길들여야 해”라고 계열사 임원들에게 조언하던 목소리도 담겼다.
그가 일찌감치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사업을 강조했던 상황도 이번에 디지털 자료로 복원됐다. 1992년 SKC 임원 간담회에서 최 선대회장은 “자동차를 두 대 이상 갖는다 해도 10대 이상 갖는 건 아니고, 텔레비전, 냉장고를 한 집에 대여섯 대씩 갖는 집은 없다”며 “하드웨어 성장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는 “하드웨어 발판 위에 제일 좋은 게 소프트웨어야. 플로피디스크가 1불이나 가나? 거기다 소프트 얹어 놓으면 한 20배 된다. 앞으로 GNP(국민 총생산)가 몇 배로 올라도 하드웨어가 늘어나는 건 한 20%? 한 80%는 소프트로 가야 돼”라고 했다.
SK의 기업 성장 과정도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았다. 세계 경제 위기를 몰고 온 1970년대 1·2차 석유 파동 당시 정부 요청으로 최 선대회장이 중동의 고위 관계자를 만나 석유 공급 관련 담판을 짓는 내용, 1992년 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할 때 좌절하는 구성원들을 격려하던 상황 등이 기록돼 있다. 1990년대 중반 유럽의 한 국가 왕세자 면담을 위해 준비한 보고서에는 ‘앞으로 기후 위기가 심각한 국제 문제가 된다‘며 ‘법정 기준치보다 훨씬 낮은 환경 기준을 맞추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그의 제안이 담겨있다.
SK는 “이번 사료에 시대를 초월하는 경영 메시지가 담겨있는 만큼, 현재의 위기를 돌파하는 해법으로 삼겠다”고 했다.
◇담배 사업 제안 거절, 김치 보관법 등도
‘선경실록‘에는 최 선대회장이 내렸던 각종 경영 판단에 대한 일화뿐 아니라 임직원과의 소소한 대화 내용도 담겨있다. 1997년 비전 선포식을 앞두고 임원들과 가진 회의 녹음도 그중 하나다. 최 선대회장은 수년 전 외국 담배 회사가 했던 ‘한국 유통권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설명했다. “돈을 보면 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담배 그 몸에 안 좋은 걸 내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의 대리를 해 가면서 할 때 사회의 안 좋은 시선이나 기업 문화와 맞지 않는 것이 있어서 못 한다고 했어.... 비즈니스는 결국 신용이야, 신용. 기업 문화가 기업 이미지와 상당한 관계가 있어.”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가족에게서 배웠다는 김장김치 보관 노하우도 녹음에 담겼다. 최 선대회장은 1996년 임원들과 차담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 부부와 같이 식사했는데 부인(홍라희 여사)이 가르쳐 준 것”이라며 “냉장고에 물을 넣고 살얼음이 얼까 말까 하는 온도까지 내려서 보관하면 1년 내내 같은 맛으로 먹을 수 있다는 거야”라고 했다. 김치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개발을 이어오던 최 선대회장은 1997년에 ‘수펙스(SUPEX) 김치‘를 시장에 내놨다.
SK 관계자는 “이번에 복원한 자료는, 최 선대회장이 정립하고 전파했던 그룹 고유 경영 철학인 SKMS와 수펙스(SUPEX·인간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 추구 문화 확산 등을 위해 활용할 방침”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