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일생을 통해 꼭 하고 싶은 이야기, 그래서 평소에는 가슴 깊이 묻어두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그것을 직접 글로 펼쳐 보인다. 이문열에게는 ‘영웅시대’(1984)가 그런 이야기였다. 6·25를 전후한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 ‘영웅시대’는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으로 당대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이문열이 유일하게 초판본을 보관해 온 소설이다.
‘나의 보물, 우리의 현대사’ 특별전이 열리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그 소장품을 마주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월북한 공산주의자 아버지로 인해 수시로 정부의 감시를 받으며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아들의 기억과 감정이 담겨 있다. 이문열은 “내 삶을 완전히 비틀어 놓은 아버지의 월북이 그때의 내게 절실했기 때문에 쓴 것”이라고 했다.
‘빨갱이 가족’ 딱지는 1948년 그가 태어나면서 물려받은 상속재산과 같았다. 오기를 부릴 땐 ‘삼무자(三無者)’라며 큰소리치고 다녔다. 나라가 없고, 아비가 없고, 스승이 없다는 뜻이었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불온한 국민은 공무원이 될 수 없었다(연좌제는 전두환 정부에 이르러 폐지됐다). 생활은 파탄의 연속이었고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니 인생의 스승, 학문의 스승도 없었다.
‘영웅시대’에서 이문열은 고백한다. 소년 시절에 공산주의라는 말은 피 묻은 칼이나 화약 냄새 나는 총 같았다고. 철이 들면서 공산주의는 형체도 색깔도 냄새도 없는 ‘생각의 다발’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그는 끊임없이 좌와 우를 비교하며 살아야 했다. 좌파는 평등을, 우파는 자유를 우선순위에 둔다. “내가 동의하기 어렵고 거추장스러운 건 좌파가 주창하는 평등이 전체주의, 집단주의로 흐르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는 게 자유라고 생각한다.”
이문열은 한때 펜을 검(劍)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전능한 검이 아니라 그것을 지닌 사람을 상하게도 하는 면도날이었다. 우파 논객이던 그는 ‘책 장례식’이라는 참사를 겪은 불행한 작가이기도 했다. 낙천·낙선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를 ‘홍위병’에 비유한 칼럼을 쓴 2001년, 자신의 책 수백 권이 화형대에서 불타는 것을 목격했다. 이문열의 삶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닮았다.
4년 전 부악문원에서 이문열을 만났다. 교수신문이 2020년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를 뽑을 정도로 ‘내로남불’이 만연한 때였다. 보수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물었다.
“먼저 산 사람들의 수고를 잊지 않는 것”이라고 이문열은 답했다. “보통은 먼저 산 사람들을 악당으로 몰지 않나. 그런데 오늘은 그들의 수고로 만들어지고 발전해 온 것이다. 물론 악당이 섞여 있었지만서도. 현대사를 보면 박정희 20년과 신군부 10년, 두 군사정권이 절벽처럼 가로막고 있지만 그 시대에 우리 삶은 더 나아졌다. 좋은 것은 빼놓고 왜 나쁜 것만 앞세우나. 적어도 ‘필요악’이었다.” 그런 형태의 권력이 아니고는 해결하지 못할 일이 많았다는 뜻이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마지막 변론기일을 앞두고 전국에서 탄핵 찬반 집회가 열렸다. 이쪽이 내란 세력을 척결하자고 외치면 저쪽은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자고 맞선다. 미워하고 파괴하는 것은 쉽다. 건설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훨씬 어렵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어리석고 나약하지만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문학은 허망해 보여도 새가 울고 개가 짖는 것보다 울림을 줄 때가 있다. 먼저 산 사람들의 수고를 잊지 않는 것이 보수다. 나라도 없고 아비도 없고 스승도 없다던 ‘삼무자’의 말이라 더 웅숭깊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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