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2회>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만세!”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쥐고 텐안먼 광장에 몰려든 군중, 1967-69년 경/ https://allthatsinteresting.com/cultural-revolution#4>

좌우막론 독재정권은 군중(群衆)을 앞세워 인민(혹은 국민)을 통제한다. “군중”은 일반적으로 다수대중을 지칭하지만, 다수대중은 실체가 모호하다. 광장의 군중이 전체 인민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광장의 군중에 반대하는 밀실의 개개인이 오히려 다수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독재정권은 군중을 앞세워 다수를 선점한 후, 곧 바로 다수를 내세워 인민(혹은 국민)을 사칭한다.

다수독재, 민주주의의 암흑

근대의 정치 사상가들이 입헌주의(constitutionalism)와 민주주의를 결합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제창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군중지배(mob rule)는 곧 다수독재며, 다수독재는 곧 ‘민주주의’의 자멸임을 역사의 시행착오를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대로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아나키가 된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은 “진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지만, 그들의 혁명운동은 최악의 아나키를 낳고 말았다. 홍위병을 앞세운 인민독재는 결국 마오쩌둥 일인의 황권통치에 불과했다. 이제 마오쩌둥이 10대-20대의 청소년과 결합되는 정치적 마술쇼를 되짚어 보자.

노회한 게릴라 전사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1965년 11월 중순 홀연히 호화열차를 타고 베이징을 떠나 우한과 항주 등지의 호화빌라에서 무려 8개월을 머물렀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수도의 중난하이(中南海)에 머무는 동안 당권파의 쿠데타로 권좌에서 밀려나는 악몽에 시달렸다는 내부자의 증언도 있다. 도망치듯 남방으로 내려간 마오쩌둥이 1966년 2월 측근의 군부 장성들에 지시해 베이징의 수도방위대를 퇴각시킨 후 선양(瀋陽)의 부대를 동원해 수도를 포위하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야사(野史)의 “2월 병변설(兵變說)”도 있다.

수도를 벗어나 있던 8개월 간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베이징의 권력층을 완벽하게 허물어뜨렸다. 그는 베이징 시장을 축출하고, 베이징 시위원회를 해체하고, 중앙의 언론을 완전히 장악했다. 물론 그는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노리고 있었지만, 직접 권력투쟁의 메가폰을 잡기 보단, 그들에게 문화혁명의 지휘를 맡겼다.

1966년 6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50일간 류샤오치는 문혁을 지휘했다. 그는 “비판투쟁”의 현장에 대규모의 공작조를 파견했고, 그의 명령에 따라 공작조는 질서 있는 계급투쟁을 연출하려 했다. 마오가 의도했을까? 공작조와 과격분자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됐다. 대학가의 급진세력은 마오쩌둥 사상을 내걸고 “혁명은 조반”이라며 갈수록 과격한 시위를 벌이며 폭력 양상을 보였다.

<1966년 3월 25-31일 파키스탄 방문 중의 국가주석 류샤오치/ 공공부문>

6월 말부터는 류샤오치의 딸 류타오(劉濤, 1944- )가 재학하던 칭화대학에서 가장 극적인 투쟁이 전개됐다.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가 칭화대학에 공작조의 중책으로 파견된 상태였다. 칭화대학 조반파의 창끝은 결국 류샤오치를 겨누고 있었다. 그중 공정(工程) 화학과 3학년생 콰이다푸(蒯大富, 1945 - )는 칭화대학 조반파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됐다. 모욕을 느낀 류샤오치는 콰이다푸를 집중 비판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6월 24일 공작조는 콰이다푸를 비판하는 “변론회”를 열었다. 그 현장에서도 콰이다푸는 “교수대에 오르더라도 나는 혁명가임을 선포하겠노라!”는 터무니없이 대담한 자기변호로 일관했다. (현장에 있었던 중국의 저항언론인 양지성이 당시 콰이다푸의 배후에 마오쩌둥의 측근이 있었다고 의심할 정도였다.) 7월 4일 공작조는 그를 우파로 몰아 구금하는데, 7월 28일 마오쩌둥의 뜻에 따라 공작조의 전면 철수가 결정되면서 콰이다푸는 청화대학 홍위병 대표로 태어나게 된다.

<1966년 홍위병 집회에서 연설하는 콰이다푸의 모습/ 공공부문>

마오쩌둥, 홍위병과 결합하다!

1950-60년대 내내 이념교육, 정치세뇌, 공포정치, 대중동원, 정치숙청이 이어졌다. 당시 중국의 정치적 토양은 문혁의 발아를 위한 최적 조건이었다. 그 비옥한 투쟁의 토양에서 싹튼 혁명의 맹아들이 바로 홍위병(紅衛兵)이었다. 그들은 여릿한 뇌수의 청소년들이었지만, 일단 사회주의 혁명 투사의 완장을 차고 나선 잔인한 집단 광기에 휩싸였다. 그들이 내면에 잠복된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바로 마오쩌둥이 홍위병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7월 16일 마오쩌둥은 양쯔강에서 수영대회에 참석해 큰 강의 급류를 따라 16킬로미터를 떠다니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틀 후 8개월 만에 베이징에 복귀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7월 24일-26일, 마오쩌둥은 작심한 듯 공작조의 파견을 큰 잘못이라 비판했고, 7월 28일 공작조의 전면적 철수를 명령했다. 곧 이어 8월 1일부터 개최된 중공중앙 11차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의 공작조 파견은 “부르주아지의 편에 서서 무산계급의 혁명을 탄압한” 행위라고 비판한다. 류샤오치는 이미 실권을 잃고 그로기 상태에 내몰렸다.

비틀거리는 류샤오치를 더 코나로 몰기 위함이었을까? 마오는 회의 현장에 자신이 홍위병 조직에 보낸 서신을 복사해서 배포하게 했다. 7월 28일 칭화대학 부속중등학교의 홍위병 조직은 마오쩌둥에 “무산계급 혁명 조반 정신 만세!” (1, 2) 두 장의 대자보를 보냈다. 제1 대자보 (1966.6.24.)의 핵심 테제는 “조반유리”였다. 제2 대자보(1966.7.2.)의 핵심 테제는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라는 이른바 사구(四舊)의 완전한 소멸이었다. 대자보를 읽고 난 마오쩌둥은 홍위병에 처음으로 답신을 보냈다.

“그대들은 6월 24일과 7월 4일 두 장의 대자보를 통해서 노동자, 농민, 혁명적 지식분자 및 혁명파를 착취하고 억압한 지주계급, 자산계급, 제국주의, 수정주의 및 그들의 주구를 향해 분노와 비난을 표출했으며, 반동파에 대한 ‘반란이 정당함’(造反有理)을 설명했다. 이에 나는 그대들에 열렬한 지지를 표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다. 무산계급은 자신의 해방을 넘어 인류 전체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전 인류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무산계급 스스로도 결국 해방을 얻지 못한다. 동지들이여! 이 도리를 주의하라!”

마오의 답신이 아직 공개되기 전 청화대학 부속중등학교 홍위병들이 제3대자보(1966.7.27.)를 작성했다. 마오주석을 향한 어린 학생들의 존경심이 혁명적 전투의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오쩌둥에 열광하는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우리들은 마오주석의 가장 충실한 홍위병이다! 마오주석께 무한 충성하며, 가장 견결히, 가장 용감히, 가장 충실히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최고지시를 집행해야만 한다. ‘조반(造反)!’이라는 마오주석의 최고지시를! 조반은 무산계급 혁명의 전통이다. 홍위병이 계승하고 발양해야 할 전통이다.... 우리는 과거에도 반란을 일으켰고, 현재에도 반란을 일으키고, 장래에도 계속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계급과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한 반란을 일으킨다. 모순이 존재하는 한, 반란을 일으킨다. 혁명적 조반정신은 1백년, 1천년, 1만년, 1억년 동안 계속 필요하다.... 홍위병 전사여,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끝까지 밀고 나가자! 위를 우러러 보며 앞으로 나아가자! 혁명의 대폭풍이 더욱 맹렬히 몰아치도록! 무산계급 혁명조반 정신 만세! 만만세!”

요컨대 마오쩌둥은 “조반유리”라는 한 마디로 홍위병들과 일심동체로 결합됐다. 홍위병들은 “조반유리”의 깃발을 들고 “대반란”의 광열(狂熱)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80년 중공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66년 8월-9월 베이징에서만 3만3695호가 털리고, 8만5196호의 가정이 축출되고, 1772명이 홍위병에 맞아 죽는 이른바 “홍팔월(紅八月)”의 서막이 올랐다. <계속>

<“마오쩌둥의 커다란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 혁명무죄 조반유리!” “자산계급 반동노선과 당내에 자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소수의 당권파를 향해 맹렬해 불을 지르자!”/ chineseposters.net>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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