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작가 주호민(39)이 최근 여성 혐오·선정성 비판을 받고 있는 일부 웹툰에 대한 검열 논란과 관련, “옛날엔 국가에서 검열을 했다면 지금은 시민이, 독자가 한다. 시민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고 17일 말했다. 주호민은 ’1000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 ‘신과 함께’의 원작자로 유명한 스타 웹툰 작가다.

/트위치

주호민은 이날 동영상 플랫폼 트위치(Twitch)에서 웹툰 작가 지망생들의 원고를 메일로 받아 첨삭 지도를 해주는 ‘위펄래쉬’라는 콘텐츠를 진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호민은 “지금은 시민이 시민을 검열하기 때문에 뭘 할 수가 없다. 아주 힘겨운 시기에 여러분은 만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계속 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려도 되나?’ ‘이거 해도 되나?’ 그 생각 자체를 한다는 게 정상이 아니다”라며 “안타까운 상황이다. 만화 그리시는 분들 힘내시고, 일단 내가 재밌다고 생각하면 그리세요”라고 말했다.

주호민의 이 같은 발언은 최근 네이버 인기 웹툰인 기안84의 ‘복학왕’삭의 ‘헬퍼’에 대해 잇달아 여성 혐오 논란이 제기되면서 작가가 사과하는 등 논란이 인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웹툰 선정성을 놓고 만화계 일각과 여성계를 중심으로 연재 중단과 방송 하차 요구가 이어졌고, 이에 대해 일각에선 ‘시민에 의한 검열’이라고 반박했다.

◇ “도덕적 우월감에 내 생각과 다르면 ‘미개하다’ 규정”

주호민은 ‘시민 독재(감시)’가 가능해진 이유로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꼽았다. 그는 “그런 (나의 관점만 옳다는) 생각들을 더 넓히는 방법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작품을 만났을 때 ‘내 생각과 같이 하면 이런 것들이 좋아진다’를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걸 보여준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주호민은 “(내 생각과 다르면) 그것을 미개하다고 규정하고 계몽하려고 한다. 너는 항상 미개한 놈이야 항상 이런 식으로만 가니까 오히려 반발심이 생기고 이상해진다”면서 “서로 검열하는 시민 독재는 더 심해질 것이다. 희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창작물에 대해 시비가 발생하면) 잘못 걸리면 잘못을 안했는데도 아작이 난다. 사과를 하면 진정성이 없다고 한다. (일부 독자들은) 그냥 (작가를) 죽이는 게 재밌는 거다”라며 “사과하면 더 팬다. 굉장히 피곤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공소시효도 없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 “혐오할 자유 용납 못해" VS “표현의 자유 억압"

최근 인기 웹툰의 일부 장면을 두고 여성혐오·폭력성 등 선정성 논란이 제기됐다. 방송에도 출연하는 인기 작가 기안84(본명 김희민·36)의 네이버 웹툰 ‘복학왕’과 만화가 삭(본명 신중석)의 격투 웹툰 ‘헬퍼’가 대표적인 사례다.


웹툰 작가 기안84

기안84는 복학왕에서 ‘능력이 없는 여성 구직자가 귀여움을 무기로 입사’한다거나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위해 남성 상사에게 성(性) 상납을 한 것처럼 묘사’하는 연출로 논란이 됐다. 기안84는 “부적절한 묘사”라고 사과한 뒤 작품을 수정했지만 웹툰 연재 중단을 요구하는 주장이 이어졌다.

기본소득당 젠더정치특별위원회·만화계성폭력대책위원회·유니브페미 등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여혐왕’ 기안84 네이버 웹툰은 혐오 장사 중단하라”며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묵인되고 방조됐던 혐오할 자유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기안84의 복학왕) 웹툰 연재 중지를 요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지난달 19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네이버웹툰 본사 앞에서 기본소득당 젠더정치특별위원회, 만화계성폭력대책위원회 등 회원들이 기안84 웹툰 '복학왕' 연재 중단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러나 드라마로 제작된 ‘풀하우스’의 원작 만화가 원수연씨는 여성계에서 기안84에 대해 가혹한 비난을 하고 있다면서 “가장 나쁜 검열”이라고 지적했다. 원씨는 “연재중단 운동은 만화 탄압의 역사, 즉 50년이 넘도록 심의에 시달려 온 선배님들과 동료작가들이 범죄자로 몰리면서까지 투쟁해서 쟁취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거꾸로 돌리는 행위이며, 만화계 역사의 치욕스런 암흑기를 다시 오게 하려는 패륜적 행위”라고 했다. 그는 “객관적 판단 없이 종횡무진 여기저기 애정 없는 비난 질로 동료 만화가들의 작품을 맥락도 없이 장면만 떼어 내 트집 잡으며 낄낄거리는 행위를 중단하라”며 “작가와 작품의 검열과 내부로 향한 총질을 당장 거두라”고 했다.

‘헬퍼’도 최근 웹툰 내 여성 등장인물에 대한 비인간적 묘사가 빈번히 등장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과도한 신체·정신적 폭력성, 미성년자 강간 미수 등의 장면이 문제가 된 것이다. 특히 해수욕장에서 납치당해 인터넷 생중계로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여중생들, 사이비 목사에게 성희롱 당하는 하반신 마비 장애인 등을 그려낸 장면이 문제가 됐다. 여기엔 여성계뿐만 아니라 남성 독자들도 비판 대열에 동참했다. 트위터에선 ‘#웹툰 내 여성 혐오를 멈춰달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졌다.

웹툰 '헬퍼'에 등장하는 여중생이 괴한에게 납치돼 성폭행당할 위기에 처한 장면. /네이버웹툰

작가 삭은 논란이 커지자 지난 14일 사과문을 올리고 “당분간 잠시 쉬며 재정비 시간을 갖겠다”며 휴재를 예고했다. 그는 “만화보다 더 잔인하고 악랄한 현실 세계의 악인과 악마들의 민낯을 보여주고 남녀노소 불문 상처 입은 모든 약자를 대신해 응징해주는 것이 연출의 가장 큰 의도였다”며 “일부 장면만 편집돼 퍼지다 보니 단지 성을 상품화해서 돈이나 벌려고 했던 그런 만화로 오해되고 있지만 스토리를 구상할 때 그런 부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 軍시절 이야기 그려낸 ‘짬’으로 데뷔…영화화한 ‘신과 함께’는 ‘쌍천만’

주호민은 2005년 운전병으로 복무한 자전적 경험을 담은 웹툰 ‘짬’으로 데뷔했다. 2010년 네이버 웹툰에 출품한 ‘신과 함께’로 큰 인기를 끌었다. 망자가 죽은 날로부터 49일 동안 일곱 번 재판받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사후(死後) 세계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2017년 ‘신과함께-죄와 벌’ 2018년 ‘신과 함께-인과 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두 영화는 관객 수 각각 1400만, 1200만을 뛰어넘으면서 국내 역대 박스오피스 3위와 14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