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한림원은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77)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림원은 “개별적 실존을 보편적으로 만드는 분명한 시적 목소리를 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글릭은 “놀랍고 기쁘다”고 말했다고 한림원은 전했다.
글릭은 1996년 폴란드 작가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이후 노벨문학상을 받은 첫 번째 여성 시인이며, 16번째 여성 수상자다. 1968년 첫 시집 ‘맏이’(Firstborn)를 낸 뒤, 1993년 퓰리처상을 받은 ‘야생 붓꽃’(Wild Iris)을 포함해 12권의 시집을 펴냈다. 2003년에는 12대 미국 계관시인이 됐다. 미국 여성 문학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지난 1993년 흑인 여성 소설가 토니 모리슨 이후 27년 만이다.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지난 2011년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이후 9년 만이다.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글릭은 퓰리처상에 이어 2014년에는 전미(全美)도서상을 받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폭넓게 활용해서 유년 시절과 가족사의 주제를 다뤘다. ‘고통의 끝에 문이 있었어요’로 시작하는 ‘야생 붓꽃’은 상실과 소외의 시대에 고통받는 많은 사람을 위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안데르스 올손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은 “글릭의 시는 솔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며 유머와 신랄한 위트로 가득 차 있다”면서 “그녀의 시 세계는 지속적으로 명료함을 추구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글릭이 자전적 요소의 중요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고백적인 시인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한림원은 글릭의 시집 가운데 2006년에 나온 ‘아베르노’(Averno)를 꼽으면서 “이 작품이 하데스에게 붙잡혀 지하 세계로 끌려가는 페르세포네의 신화를 몽환적으로 해석한 거작”이라고 호평했다.
글릭은 미국으로 이민한 헝가리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뉴욕에서 식료품점 등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웨슬리대를 졸업했다. 글릭은 네댓 살부터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었고 시작(詩作)을 할 만큼 문학적으로 조숙했다.
하지만 글릭은 고교 졸업반 때 극심한 거식증으로 학교를 중퇴한 뒤, 정신분석학자에게 7년간 상담 치료를 받은 정신적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는 “언젠가는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도 더욱 분명하고 강렬하게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사라로렌스대와 컬럼비아대에서도 시 문학 수업을 받았지만, 정식 졸업하지는 못했다.
이 같은 사춘기 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과 혼돈 속에서도 ‘타고난 초연함’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일찍부터 시인의 뚜렷한 시 세계가 됐다. 이 때문에 에밀리 디킨슨부터 엘리자베스 비숍으로 이어지는 미 여성 시인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현대 미국 시를 전공한 양균원 대진대 영문학과 교수는 본지 통화에서 “굉장히 언어가 간결하면서도 투명해서 어려운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간결하고 투명한 언어 속에서도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평했다. 양 교수는 2009년 글릭에 관한 논문에서 “자아의 혼돈 상태는 글릭의 시적 진리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녀는 어린 시절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표면상으로는 침착하고 냉정하며 무관심한 자세를 견지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자연과 트라우마(상처), 욕망의 문제는 글릭의 문학 세계에서 중요한 화두가 됐다. 정은귀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올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서 삶의 냉혹함과 차가운 일상 속에서도 자연의 치유력을 노래한 시인의 시 세계가 주목받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노벨문학상 상금은 10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3억원). 오는 12월 시상식은 코로나 사태로 온라인 개최될 예정이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백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