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일보 100주년 기념 '한글전 ‘ㄱ의 순간’ '을 찾은 뉴욕 디자이너 유나 양. 노주환의 '생각을 담다'에 빠져든 모습이다/김연정 객원기자

서울 충무로 인쇄소 골목에 버려진 납활자들이 뉴욕 유명 패션 디자이너 유나 양(42)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생선 냄새, 땀 냄새, 약재 냄새가 묘하게 어우러진 뉴욕 오래된 시장 골목에서 최고급 패션쇼를 선보이며, 극과 극의 대조적인 아름다움으로 평단과 소비자들의 찬사를 받은 그였다. 10일,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노주환 작가의 ‘생각을 담다’를 마주한 유나 양은 “버려진 과거의 문화를 수집해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에 매료됐다”면서 “너무 흔하고 익숙해 홀대받아 온 한글처럼, 과거의 유산으로 잊혀 가던 납활자가 단어와 문장이란 생명력을 입고 불멸의 존재로 기억되는 듯하다”고 말했다. “생(生)을 다했다고 생각한 폐물(廢物)이 3D로 형상화한 조각 작품처럼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표현된 것 같아요.”

뉴욕 디자이너 유나 양이 조선일보 100주년 기념 '한글전 ‘ㄱ의 순간’ ' 중 최정화 작가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은 유나 양은 한글의 힘찬 필치 같은 느낌을 주는 패턴을 맞춰 입었다. /김연정 객원기자

비대칭 재단과 화려한 레이스 장식으로 2010년 첫 도전 한 뉴욕 패션쇼에서 미국 최고 패션지로 꼽히는 WWD 1면을 장식하며 데뷔한 유나 양은 주특기인 오간자(organza·나일론, 실크, 레이온, 아크릴 같은 장섬유로 만든 평직 옷감으로 얇고 투명하면서도 빳빳한 느낌이 나는 소재) 원단을 쓸 때마다 ‘오간자’ 대신 ‘코리안 실크(비단)’란 말을 고집해왔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에게 미술 전시장은 또 하나의 안식처. 이번 전시장을 찾으면서도 “아는 듯하지만, 단편적 앎에 그쳐 있던 한글을 유명 작가들의 다층적 시각을 담은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신선한 경험”이라고 했다.

이진경 작가 작품 앞에서의 유나 양 디자이너. /김연정 객원기자

노주환의 작품과 함께 유나 양이 “펄떡이듯 살아 숨 쉬는 듯한 글자의 힘과 아우라에 빠져들었다”며 극찬한 작품은 서예박물관 3층에 있는 이진경 작가의 ‘새로운 청구영언’. 만주와 연해주 등 독립운동 후손들의 구전 노래를 나무와 종이에 빼곡히 옮겨 놓은 공간이다. “직설적이어서 이해하기도 쉽고, 글자들이 그 자체로 곡조화돼 음악으로 들리는 것 같아요. 시청각의 요소를 두루 지닌 한글의 속성을 이야기해주는 듯합니다.”

이진경 작가 '새로운 청구영언'과 유나 양 디자이너. /김연정 객원기자

2층 오인환 작가의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에선 향이 타들어 가는 시간까지 완벽하게 계산해 탄생한 조형미에 일종의 ‘오트 쿠튀르’(장인의 최고급 수공예 의상) 같은 작가 정신을 느꼈다고 했다.

유나 양이 극찬한 작품 중 하나인 오인환 작가 작품 /김연정 객원기자

유승호 작가의 작품 ‘가나다라’와 ‘ㄱ으로부터’ 앞에선 무릎을 치며 “이거다!”라고 외쳤다. “위트가 대단해요. ‘ㄱ으로부터’에 등장하는 그림은 마치 이모티콘 같은 느낌이랄까? 이모티콘은 21세기에 만들어진 상형문자라고 할 수 있잖아요. 산수화지만 알고 보면 깨알 글씨인 ‘가나다라’도 한국인 특유의 집요함과 섬세함, 흥이 어우러진 작품이네요.”

유승호 작가의 '가나다라' 앞에선 유나 양 디자이너. /김연정 객원기자

런던, 밀라노에 이어 뉴욕까지 20년 가까이 해외 패션계에 몸담으면서 외국 팬들로부터 한글, 한국어에 대해 많은 질문을 받았다는 유나 양은 “고대 문명과 한글을 잇는 각종 유물을 비롯해 한글의 진화와 철학을 가늠해볼 수 있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어우러진 이 전시가 제가 있는 뉴욕에서도 열렸으면 좋겠다”면서 “이번 전시에서 영감받은 한글의 이미지와 스토리로 패션 작품을 발표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