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한국 문화계의 저력과 바닥이 모두 드러난 해였다. 전례 없던 세계 기록들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쏟아냈다. 하지만 동시에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끝도 모를 추락이 계속됐다. 빛과 그늘을 모두 보았고, 환희와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미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르며 한국 영화사를 다시 썼다. 방탄소년단(BTS) 역시 한국 가요 역사상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에서 지구촌 문화계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기덕 감독은 동유럽 라트비아에서 코로나에 확진된 직후 숨을 거두었다. 클래식 사상 불멸의 작곡가로 꼽히는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을 맞아서 연중 기념 행사가 마련됐지만, 역시 코로나 여파로 대부분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말았다. 우리를 웃고 울게 한 열흘을 통해서 문화계를 돌아본다.

2020년 우리를 울고 웃게 한 문화계의 열흘

1)2월 9일

봉준호 감독, ‘기생충’으로 미 아카데미 4개 부문 석권

조짐은 새해 벽두부터 심상치 않았다. 1월 5일 ‘아카데미의 전초전’으로 불리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기생충’은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지상과 지하의 수직적 공간 구분으로 빈부 격차를 시각화한 그의 상상력에 세계가 공감했다. “자막의 장벽, 장벽도 아니죠.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어 작품에 대한 자긍심이 오롯이 담긴 봉준호의 수상 소감도 통쾌함을 안겼다. 2월 9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상인 작품상과 감독상·각본상·국제극영화상까지 4관왕에 올랐다. 그는 “이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 5등분해서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마틴 스코세이지·쿠엔틴 타란티노·샘 멘데스 등 감독상 후보에 함께 올랐던 거장들에 대한 따스한 동료애의 표현이었다. 100년 역사의 한국 영화가 마지막 1인치 장벽을 뛰어넘는 순간이기도 했다.

2)3월 12일

미스터트롯, 최고 시청률 35.7% 기록하며 종영

‘영웅 탄생’의 순간, 우승자 임영웅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결승전 당일이 저희 아버지 기일이었다.”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은 지난 1월 첫 방송 이후 종편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 기록을 연일 경신하면서 전편 ‘미스트롯’의 인기를 이어갔다. 잠재력 있는 신세대 참가자들을 발굴하는 경연 형식을 트로트에 접목한 과감한 역발상이야말로 성공 동력이자 장수(長壽) 비결이었다. ‘트로트는 정적(靜的)이고 예스럽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버라이어티 쇼를 방불케 하는 역동적 연출과 인간적 사연으로 한층 생생하고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지나친 승부욕과 경쟁 심리로 편파·반칙 논란이 불거졌던 여느 경연 방송과는 달리, 참가자들의 우정과 동료애도 빛났다. 방송 프로그램에만 그치지 않고 관련 공연까지 ‘복합 문화 상품’의 모범적 사례로도 꼽힌다. 더불어 고달픈 세상살이에 지친 국민들의 마음까지 함께 녹였다.

3)3월 31일

동화 작가 백희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수상

“(나는) 유기견 같은 작가.”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상을 받은 작가의 말치고는 다소 과격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상의 수상자인 그림책 ‘구름빵’의 작가 백희나에게 올해는 천국과 지옥을 모두 경험한 해가 됐다. 지난 3월 말 한국인 작가로는 처음으로 린드그렌상을 받았다. 작가는 “너무 드라마틱해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상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에밀은 사고뭉치’ 같은 걸작을 남긴 린드그렌을 추모하려 스웨덴 정부가 제정했다. 상금도 500만 스웨덴크로나(약 6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뒤 ‘구름빵’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출판사를 상대로 냈던 저작권 소송에서는 최종 패소하고 말았다. 한편 지난 9월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직후, ‘알사탕’ ‘달 샤베트’ 같은 그의 동화책들이 아동 도서 1~7위를 휩쓸기도 했다.

4)7월 30일

연예인 유재석의 부캐릭터 돌풍

방송인 유재석이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를 통해 선보이는 캐릭터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부캐릭터(부가적 캐릭터)’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지난해에는 트로트를 부르는 가수 ‘유산슬’로 출연해서 ‘합정역 5번 출구’ 같은 곡을 히트시키더니, 올해는 ‘싹쓰리’ ‘환불원정대’ 같은 그룹들로 여세를 몰아갔다. 유재석이 가수 비·이효리와 함께 결성한 3인조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는 1990년대 댄스 음악을 표방하면서 복고풍(레트로) 바람을 몰고 왔다. 이들의 발표곡 ‘다시 여기 바닷가’는 여름 차트 1위에 올랐다. 이어서 엄정화·이효리·제시·화사의 4인조 가상 걸그룹 ‘환불원정대’도 가요 차트에서 BTS를 누르고 정상을 차지했다. 당초 연예계 트렌드에서 출발한 ‘부캐릭터’는 본래 직업 이외의 부업(副業)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면서 사회적 현상으로 번졌다. 이처럼 부캐는 저성장 시대의 초조함과 불안을 함께 담은 말이기도 했다.

5) 8월 20일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91)옹 국보 ‘세한도’ 기증

지난 11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 국보 ‘세한도(歲寒圖)’는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91) 선생의 기증을 기념하고자 마련된 전시다. 1844년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에서 자신에게 물심양면 도움을 준 제자 이상적에게 답례로 그려 보낸 걸작이다.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이 걸작은 수차례 주인이 바뀐 끝에 개성갑부 손세기의 아들인 손창근씨가 물려받았다. 손씨는 이미 2012년 시가 1000억원에 이르는 경기도 용인의 산림 200만평을 국가에 기증했다. 당시 그가 내걸었던 조건은 딱 하나, “신상을 공개하지 말아달라”는 것뿐이었다. 2018년에도 소장품 304점을 기증한 손씨는 올해 “평생 자식보다 더 귀하게 아낀 작품”이라던 세한도까지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했다. 손씨는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6)8월 25일

‘조국 흑서’ 출간 직후 돌풍

“586은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사회에 뿌리내린 신(新)적폐다.” 진중권·김경율·권경애·서민·강양구 등 ‘조국 사태’를 계기로 현 정부 비판자로 돌아선 필자들이 펴낸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는 ‘조국 흑서’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출판계 돌풍을 일으켰다. 당초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옹호했던 ‘조국 백서’(검찰 개혁과 촛불 시민)에 대한 반박이자 맞대응의 의미로 나왔다. 출간 첫날부터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더니 10만부 팔린 히트작이 됐다. 집권층 내 주류로 등장한 586세대의 정치·도덕적 타락, 친문 진영의 ‘팬덤 정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권력 편에 서는 방송 등이 모두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의 우상화에는 운동권 NL(민족해방)의 개인 숭배 문화가 있는데 북한식 정치 문화가 남한의 부르주아 정치까지 투영된 것”이라는 진중권의 비판처럼, ‘좌파’를 아는 ‘좌파’의 비판이기에 더욱 매섭고 통렬하게 다가오는 걸지도 모른다.

7)9월 1일

방탄소년단(BTS), ‘다이너마이트’로 한국 가요 사상 빌보드 싱글 차트 첫 1위

8년 전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 열풍에도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 그쳤을 때 거기가 우리의 한계인 줄만 알았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래를 의미하는 ‘빌보드 싱글 1위’는 우리 몫이 아닌 줄만 알았다. 하지만 올해 방탄소년단(BTS)이 ‘다이너마이트’로 마지막 남은 고지였던 빌보드 싱글 1위에 마침내 올랐다. 신나는 디스코풍의 첫 영어 가사 노래로 세계 정상을 밟은 것이다. 영어 노랫말 덕분에 가능했던 ‘일회적 현상’이라는 비판이나 우려를 잠재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들은 두 달 뒤에 곧바로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는 한국어 노래로 빌보드 1위를 탈환했다. “모든 사람들이 힘들고 지쳐있을 때 마음의 위안과 휴식,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치유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BTS 역시 또 한번의 성장을 보여줬다”(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는 평가가 나왔다.

8)10월 8일

미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 노벨문학상 수상

“이거 녹음되는 건가요? 지금 커피든 뭐든 좀 마셔야겠으니 2분 안에 (끝내주세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도 모닝 커피만큼 급하지는 않았나 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은 스웨덴 한림원의 전화를 받고서 커피가 필요하니 통화를 짧게 끝내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시간은 오전 7시쯤이었다. 글릭은 “솔직히 말하면 사고 싶던 집을 새로 살 수 있게 됐다”는 소박한 기쁨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일상이 걱정된다”는 시인다운 근심을 함께 털어놓았다. 글릭은 퓰리처상과 전미 도서상을 받았고 2003년 미국 계관시인이 됐다. 하지만 수상자 발표 직전까지도 해외 언론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의외의 선택이었다. 국내에도 아직 번역된 시집이 없다. ‘노벨상 특수’를 누리지 못하게 된 국내 출판사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대신에 글릭의 시 ‘눈풀꽃(Snowdrops)’이 수록된 선집(選集) ‘마음챙김의 시’가 국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9)12월 11일

김기덕 감독, 라트비아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으로 사망

해외 영화제 수상 기록으로만 놓고 보면 분명 봉준호 이전에 김기덕이 있었다. 김기덕 감독은 2004년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감독상), 2011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본상, 2012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등 유럽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수상한 유일한 한국 영화인이었다. 하지만 여배우와 스태프에 대한 성폭행과 폭력 논란이 쏟아지면서 사실상 국내 활동을 중단한 채 해외에 체류했다. 최근에는 라트비아에 집을 구입하고 영주권을 취득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 감염증으로 이역만리 라트비아에서 눈을 감았다.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 “한국 영화계에 채울 수 없는 크나큰 손실이자 슬픔”(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라는 추모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 사람들에게 그토록 끔찍한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를 기리는 건 잘못된 일”(‘기생충’의 자막을 번역한 달시 파켓)이라는 반박도 나왔다.

10)12월 17일

베토벤 탄생 250주년 코로나로 기념 공연은 줄줄이 취소

올해는 불멸의 작곡가로 추앙 받는 악성(樂聖) 베토벤(1770~1827)의 탄생 250주년이었다. 청력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걸작을 쏟아내고 인류애를 노래했던 악성의 음악 정신을 기리고자 지구촌의 클래식 음악계도 그의 생일인 12월 17일에 맞춰 굵직한 기념 공연들을 준비했다. 하지만 코로나 장기화 여파로 해외 투어와 대면(對面) 공연들이 줄줄이 취소되는 바람에 악성의 생일상도 그만 초라해지고 말았다. 특히 ‘가장 아름다운 악기’라던 사람의 노래가 비말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세밑의 단골 레퍼토리였던 베토벤의 마지막 9번 교향곡 ‘합창’마저 올해는 듣기 힘들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따라 대편성 관현악 대신 단출한 실내악 편성으로 편곡하고, 마스크로 단단히 무장한 성악가들이 불렀던 서울시향의 ‘합창’ 공연이 온라인으로 중계되면서 슬픔과 감동을 모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