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선별과 여과의 오랜 역사. 클릭 한 번이면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어떤 리스트를 제출하느냐는 것. 조선일보가 신뢰하는 전문가들이 자신만의 리스트를 제출합니다. 서울대 건축과 서현 교수의 ‘지하철에서 만나는 최고의 풍경 5’에 이어, 2회는 강호 동양학자 조용헌의 ‘코로나, 나의 은둔지 5’.
감염병을 겪다 보니까 어디 좀 조용한 데 가서 은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옛날 사람들은 이럴 때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다녔다. 정감록이 인기 있었던 배경에는 십승지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십승지는 외부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산속 오지이면서도 최소 한도의 논밭이 있어서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공간이다. 그러나 현대인이 도시의 아파트를 팔고 이런 오지로 이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은거나 숙박은 못 하지만 잠깐이라도 들러서 풍광을 감상하고 맑은 공기를 흡입하고 땅에서 올라오는 좋은 기운을 받는 여유는 가질 필요가 있다. 나는 평소에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에너지가 고갈되어 간다고 느낄 때 찾아가는 장소가 몇 있다.
전남 해남 달마산 도솔암
먼저 해남 달마산 도솔암이다. 만화에 나오는 ‘머털도사’가 살 것 같은 공간. 아니면 무협지의 장문인이 거처할 만한 암자라는 인상을 준다. 백두대간이 서남쪽으로 흘러가서 멈춘 바위산이 달마산이다. 바위산의 봉우리들이 불꽃 같은 형상이다. 그 달마산 자락이 바닷가 앞에서 멈추었다. 뾰쪽뾰쪽 솟아 있는 날카로운 창검 사이에 걸터앉아 있는 드라마틱한 암자이다. 암자에서 바라보이는 서쪽 바다로는 진도 앞바다가 보인다. 섬들 사이로 석양이 진다. 특히 석양 빛이 간접조명을 받아 잔잔한 바다에서 위로 쏘아주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장관이다. 해가 수평선에 거의 다다를 무렵 바다 밑에서 하늘을 향해 붉은 노을을 반사한다. 이때 노을이 붉은 물감처럼 하늘의 구름들을 물들인다. 남쪽으로는 완도 앞바다가 보인다. 완도 앞바다에 보름달이 뜨면 바다 전체가 하얗게 보인다. 월광이 바다에 물들면 하얗게 보인다. 이 하얀색이 달마산의 바위 전체를 비춘다. 바다와 산 전체가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는 장면을 보노라면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달마산 도솔암의 진도 쪽 일몰과 완도 쪽 월광을 보면 내가 이 세상에 온 보람을 느낀다.
충남 공주 계룡산 등운암
계룡산의 등운암. 계룡산은 그렇게 높지는 않은 미들급 산이지만 산 전체가 하나의 통바위로 되어 있다. 티베트 접경의 카일라스 산이 통바위다. 통바위로 되어 있을수록 기운이 세다고 보는데, 계룡산은 한국의 카일라스이다. 계룡산의 또 한 가지 장점은 접근성이다. 공주⋅논산⋅강경의 들판에서 접근이 가능했다. 먹고살 수 있는 식량 공급이 용이하다 보니 떠돌이 도사들이 살기에 좋았다. 계룡산 연천봉의 바위 봉우리에 자리 잡은 등운암은 역대로 불가나 도가의 선수들이 선호했던 명당 터이다. 여기에서 사흘밤만 자고 가도 신비 체험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등운암 터도 역시 앞에 도열한 천왕봉⋅ 쌀개봉⋅관음봉들이 이쪽으로 에너지를 쏘아주고 있는 형국이다. 등운암 뒤의 바위에는 조선 왕조의 멸망을 예언한 유명한 풍수도참이 새겨져 있다. ‘方百馬角 口或禾生(방백마각 구혹화생)’. 472년 만에 나라를 옮긴다는 뜻이다. 조선이 망하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믿었다. 후천개벽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의 준비를 모색하던 도사들이 선호했던 터이다. 나는 ‘방백마각 구혹화생’의 바위에 앉아 계룡산 암봉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로운 시대가 곧 온다고 믿었던 19세기 그 떠돌이 도사들의 수군거림이 들린다.
경남 산청 둔철산 정취암
산청의 정취암. 지금은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는 암자가 되었지만, 20년 전만 해도 산 밑에서 등짐을 메고 2시간은 올라가야만 도달할 수 있었던 곳이다. 저 밑에서 바라보면 절벽 위에 독수리집처럼 높은 곳에 있었던 도량이기도 하다. 정취암이 기대고 있는 산 전체는 둔철산(屯鐵山)이다. 산 전체에 철이 많이 들어 있음을 암시하는 지명이다. 철이 많으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인체의 피에도 철분이 들어가 있다. 철이 많은 바위산은 인체의 핏속으로 강력한 전기 에너지를 충전시켜주는 작용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에너지가 충전되면 컨디션이 좋아지고, 의욕이 샘솟으면서 신령스러운 꿈을 꾸게 된다. 자기 앞일은 자기가 꾸는 꿈에 메시지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앞일을 예시해주는 선견몽(先見夢)은 철분이 많이 함유된 산이나 명당에서 꾼다. 구약에도 신비한 꿈 이야기가 많지만 성경의 선지자들이 꿈을 꾸었던 장소들도 보통 장소가 아니라 지자기가 강하게 흐르는 암반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둔철산의 정취암에서 기도를 해본 불교도들은 대개 영험한 꿈을 꾸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인들도 기도발이 잘 받는 사람은 꿈을 꾼다. 삼성 세탁기나 LG 세탁기나 세탁 기능의 큰 차이는 없다. 영발의 세계는 꼭 브랜드를 따질 필요가 없다. 나도 정취암을 방문하기 전에 흰여우가 나타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경남 하동 지리산 칠불사
하동 지리산 칠불사. 칠불사에 가면 ‘천개의 고원’ 위에 올라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고원에는 바람에 휘청거리는 녹색의 숲, 산새들의 우짖는 소리, 파란 하늘과 대비를 이루는 흰 구름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도시에서 산다고 자동차 매연과 소음에 참 시달리며 살았구나!’ 지리산은 동서로 40㎞, 남북으로 30㎞. 1000미터가 넘는 봉우리만 40여개에 이르는 한국 최대의 산이다. 산 전체가 모두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산이기도 하다. 칠불사는 이 지리산의 가장 깊숙한 위치이면서도 쇠붙이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 터. 부드러운 녹색의 융단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해발 800m의 칠불사 운상선원(雲上禪院)은 구름 위에 있어서 삼복더위에도 시원하기 그지없다.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과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7왕자가 여기에서 도를 통했다. 2천년 전부터 정신세계 고단자들 사이에서는 이름난 명당터였던 것이다. ‘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물이 되고, 백년 동안 탐낸 물건은 하루아침에 먼지가 된다) 구절을 읽고 출가한 통광(通光)스님의 원력이 서려 있는 도량이다.
경남 하동 지리산 불일암
하동 지리산 불일암. 쌍계사 뒤로 1시간 정도 올라가면 있는 암자이다. 암자는 조그마하지만 암자의 좌측 봉우리는 청학봉이고, 우측은 백학봉이다. 청룡과 백호가 아니라 청학과 백학이 좌우로 이 터를 싸고 있다. 암자에서 아침 7시쯤 일어나 저 아래쪽의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면 멀리 섬진강에서 피어오른 하얀색의 안개가 옥황상제의 허리띠처럼 지리산을 감아 돌아가고 있다. 아침마다 피어오른 이 흰색의 물안개를 볼 때마다 명상을 한다. 인간 세상에서 내가 그처럼 집착했던 것들이 저 섬진강 안개처럼 잠시 피어 올랐다가 사라지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면서도 새벽잠에서 깨어나 눈앞에 보이는 풍경. 저 더러움이 하나도 없는 천진무구한 하얀색의 물안개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만하면 ‘別有天地非人間’의 세계이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수많은 방외지사(方外之士)들이 지리산에 있다는 유토피아를 찾아 헤맸다. 바로 청학동이다. 푸른 학이 살고 있다는 청학동에 들어가면 전쟁도 없고, 굶주림도 없고, 전염병도 없다고 믿었다. 지리산에 몇 군데의 청학동이 있지만 나는 이 불일암을 가장 유력한 청학동으로 여긴다. 청학동을 흠모했던 최치원도 이 불일암의 풍광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은거할 만한 영지(靈地)는 2000년 전부터 이 땅에 전래된 불교 사찰에서 선점해버린 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암자 기행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의 넓은 아량을 바란다. 유럽에 가보니까 김이 솟는 기독교 영지가 엄청나게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