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이 아니라 PC방처럼 보였다.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케나즈’ 스튜디오. 벽면에 일렬로 놓인 컴퓨터 모니터와 태블릿PC 화면을 앞에 두고 직원 수십 명이 아무 말 없이 마우스를 쥔 손을 바삐 움직였다. 예외 없이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거나 색을 입히고 있었다. 로맨틱 코미디 웹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이 웹툰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었다. 국내에서만 69만명이 이 웹툰을 봤다. 케나즈는 카카오페이지에 웹툰을 납품하는 콘텐츠 공급 업체(CP)로 서울 서초구와 마포구, 제주도에 이런 ‘K웹툰 팩토리(factory)’를 마련했다. 작가 170명이 5~6명씩 팀을 이뤄 매주 50여 편의 작품을 생산한다.
이우재 케나즈 대표는 “예외적 재능이 아니라면 작가 한 명에게 의존할 경우 작화 수준이 들쭉날쭉하고 지속적 연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며 “공동 제작 방식을 도입해 안정적인 생산과 높은 품질,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고 말했다. 작품들은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국내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 중국, 인도네시아 등 5개 나라 시장에 서비스된다. 지난 2018년 설립된 케나즈의 매출은 해마다 3배씩 성장했고, 처음 9명이던 소속 작가는 170명으로 늘었다. 카카오페이지에만 케나즈 같은 콘텐츠 업체 1300여곳이 웹툰을 공급하고 있다.
유명 만화가 사무실에 들어가 이름 없는 문하생으로 청소부터 온갖 잡일을 도맡던 도제식 만화 제작 방식은 철 지난 옛이야기.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나가는 K웹툰은 표준 계약을 맺은 분야별 전문 작가들이 철저한 분업 방식으로 제작하고 있었다.
케나즈 기획팀은 웹툰으로 만들 만한 웹소설과 웹드라마를 직접 발굴하거나 사전 의뢰를 받고서 팀을 꾸린다. 먼저 콘티 작가가 밑그림을 그린다. 이어 메인 작가가 캐릭터의 세부적인 표정과 복장을 그려넣는다. 그다음 배경 작가가 만화 속 배경을 덧칠하고, 컬러 작가가 색을 입힌다. 이후 웹툰 PD가 말풍선과 대사를 입히고, 카카오페이지 웹툰 담당자와 협의해 내용을 수정하기도 한다. 최종 결과물은 카카오페이지에 전달돼 독자와 만난다.
모든 팀원은 작품 수익 지분을 갖고, 작가 명단에도 함께 이름을 올린다. 컬러 작가 장세연(25)씨는 “웹툰 제작 전체 과정을 해낼 수 없더라도 색칠에 소질이 있다면 전문 컬러 작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 대부분이 만화·애니메이션 전문 학과를 졸업한 20·30대. 여성 작가는 일반적으로 나이 스물넷에 활동을 시작한다. 작가들은 일반 회사원처럼 오전 10시에 일을 시작해 오후 7시에 마친다. 노성규 케나즈 CFO(최고재무책임자)는 “소속 작가 3년 차 연봉은 6000만~8000만원 수준”이라며 “매년 3억원 이상 벌어들이는 고소득 메인 작가들도 있다”고 말했다.
카카오페이지는 케나즈 같은 콘텐츠 업체들에서 공급받은 7000여 오리지널 작품 가운데 검증된 930여 작품을 해외에 서비스하고 있다. K웹툰은 글로벌 웹툰 시장에서 물량이 달릴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카카오페이지 관계자는 “올해엔 대만과 태국 시장에 진출한다”며 “K콘텐츠를 공급하는 글로벌 플랫폼을 구축해 독자 1억명을 확보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출판 만화와 달리, K웹툰은 모든 제작 공정이 디지털로 이뤄진다. 가공이 쉽기에 현지화에도 유리하다. 예컨대 미국에서 서비스하는 웹툰은 말풍선과 대사 파일을 영어 번역으로 바꾸고, 배경 파일만 수정해 감쪽같이 미국 현지 배경을 입힐 수도 있다. 글로벌 흥행작이 되면 수백억원 수익이 가뿐하다. 웹소설과 웹툰으로 서비스된 ‘나혼자만 레벨업’ IP(지식재산권)는 400억원을 벌어들였다. 시장이 커지면서 웹툰도 거대해진다. 보통 한 작품을 1년간 연재하는 제작비는 1억원 정도이지만, 케나즈는 올해 작가 20명을 투입하는 20억원대 웹툰 제작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유명작가 웹툰 VS 팩토리 웹툰
시장과 플랫폼이 달라지면서 웹툰 제작 방식도 변화를 거듭했다. 1990년대말 웹툰은 포털에서 국내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부가 서비스에 불과했다. 출판만화 작가들이 기존 작품을 그대로 스캔해 온라인에 올리거나, 간단한 일상 이야기를 온라인 만화로 올리는 작가가 등장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복잡한 서사를 갖춘 장편 웹툰이 인기를 끌며 유명 작가들이 탄생한다. 이들 역시 보조 작가를 두고 일을 분담하지만, 수익은 유명 작가에게 집중되는 구조다. 2010년대 후반부터 대형 IT(정보기술) 업체의 웹툰·웹소설 서비스가 해외에서 승승장구하는 글로벌 사업이 되면서 콘텐츠를 대규모로 납품하는 전문 업체(CP)들이 생겨났다. 웹툰 업계 관계자는 “CP는 작가 개인의 정체성을 담은 예술 작품보다 전 세계 독자들을 상대로 짧은 시간 편하게 즐기는 콘텐츠를 주로 공급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