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play) 버튼을 누를 때 조마조마했다. 한국 첫 SF 영화가 준 불안이다. 넷플릭스로 ‘승리호’를 보는 일이 할리우드 수준과 1광년쯤 뒤떨어진 우리 현실을 무겁게 확인하는 시간이면 어떡하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 열패감은 끝났다. 영화 시작 5분도 안 돼 “CG(컴퓨터 그래픽) 좋네”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우주로 영화를 쏘아올릴 만한 로켓 추진체는 확보한 셈이다.
2092년 지구는 숨만 붙어 있다. 환경오염으로 식물은 사라졌고 산소 마스크를 쓰고 다닐 정도다. 우주개발 기업 UTS가 위성 궤도에 새 정착지를 만들었지만 선택된 소수(5%)만 갈 수 있다. 주인공들은 청소선을 타고 우주 쓰레기를 수거하며 살아가는 하류 인생이다. 장 선장(김태리), 조종사 태호(송중기), 엔진 크루 박씨(진선규), 작살잡이 업동이(유해진) 등 ‘승리호’ 선원들이 대량살상무기로 알려진 로봇 도로시를 발견하면서 이야기에 속도가 붙는다.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승리호'는 공개된 지 하루 만인 6일 넷플릭스 세계 영화 시청 순위 1위에 올랐다. 소셜미디어에서도 주말 내내 호평과 혹평, 갑론을박이 벌어질 만큼 화제였다. SF는 거죽일 뿐이고 골격은 성장 스토리다. 영화는 서로 속이고 싸우고 오합지졸에 불과하던 이 생계형 우주 청소부들이 변화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 이들이 한 방향으로 뭉치자 어벤져스 못지않은 괴력이 화면에 펼쳐진다. 광활한 우주부터 승리호 내부까지 비주얼은 섬세하고 미끈하다. 출신 배경이나 우주 전투 장면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스타워즈’ 등과 겹쳐지는 게 흠이다.
‘늑대소년’(2012)으로 700만 관객을 모은 조성희 감독은 판타지를 잘 만드는 재능을 이제 우주로 확장했다. 유머도 잃지 않는다. 유해진은 모션 캡처와 목소리 연기로 작살잡이 로봇을 완성했다. 국산 SF의 놀라운 첫걸음이다. 시각특수효과(VFX) 전문가 1000여명이 빚어낸 스펙터클을 극장에서 볼 수 없어 아쉬울 정도다. 하지만 한국인을 선(善), 나머지를 악(惡)으로 짠 설계와 양념처럼 넣은 신파는 실망스럽다. 상업적이고 손쉬운 결말을 선택하는 바람에 매력이 상당 부분 훼손되고 말았다.
‘승리호’는 현실과 다른 세계로 관객을 데려간 게 아니다. 초능력 슈트를 입은 히어로가 아니라 한국 서민들이 우주선 타고 날아다닌다. “가난이 죄인지 죄를 지어 가난한 건지” “삼촌, 우주에서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어요” 같은 대사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정상 가족보다 더 끈끈한 유사(類似)가족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2018)에서 이미 보여주지 않았나. 가족을 만드는 건 혈연이 아니라 같이 보낸 시간이라고. /박돈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