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저녁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인근의 빌딩 지하 1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보잉 737NG 제트여객기의 조종석이 나타났다. 조종사 훈련보조용으로 만든 ‘FTD’급 항공기 시뮬레이터였다.

지난 9일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인근에 위치한 시뮬레이션 업체 '로테이트'에서 보잉 737 제트여객기 시뮬레이터에 탑승한 항공기 조종 동호인들이 가상 비행을 위해 각종 스위치를 조작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기장석에 앉은 이준환(45)씨가 이륙을 위해 엔진 추력 조절 레버를 앞으로 밀자 속도계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80노트” “브이원(V1)” “로테이트(rotate)” “브이투(V2).” 이씨가 부기장석에 앉은 한상필(23)씨와 각종 사인을 주고 받으며 조종간을 당기자 화면 속 비행기가 부드럽게 날아올랐다. 제주공항을 이륙해 약 40분 뒤 부산 김해공항에 착륙할 때까지 둘은 계속 항공 전문 용어를 주고받았고, 쉴 새 없이 각종 스위치를 조작했다.

실제처럼 비행했지만 두 사람은 조종사가 아닌 항공기 조종 애호가다. 함께 온 서광명(37)씨는 “평소 집에서 PC용 시뮬레이터로 취미 삼아 비행기 조종을 연습하는데, PC화면이 아닌 조종석에서 연습해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다”고 했다.

◇코로나인데 시뮬레이터 조종 동호인은 늘어

지난해 코로나 확산을 계기로 이들과 같은 비행 시뮬레이터 동호인이 크게 늘었다. 비행 시뮬레이터는 실제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가상으로 조종 체험을 할 수 있는 기기로, 항공사에서 쓰는 수백억원짜리도 있지만 가정용 PC에 조종간, 페달 등 기초적인 조종 장치들을 연결해 쓸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터진 지난해 PC용 시뮬레이터를 사용하는 동호인이 크게 늘었다.

국내의 경우 시뮬레이터 동호인들이 모인 ‘Flight with us’라는 인터넷 카페 회원수가 작년 9월 처음 1만명을 넘겼다. 신규 가입자가 2019년에는 1643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3106명으로 1년 만에 90% 가까이 늘었다. PC용 시뮬레이터 사용자들에게 가상 항공 관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밧심’은 지난해 한국인 신규 가입자가 674명으로 전년보다 50% 늘었다.

민간 시뮬레이터 센터까지 찾는 일반인도 소폭 늘었다. 2019년 10월 문을 연 ‘로테이트’의 대표 임재원(36)씨는 “처음엔 현직 조종사나 예비 조종사가 주 고객이 될 것으로 봤는데, 지금은 전체 손님 중 일반인 비중이 더 많다”고 했다. 다른 시뮬레이터 업체인 서울시뮬레이션센터는 “코로나 전보다 일반인 손님이 50%쯤 늘었다”며 “부모님과 함께 오는 어린 학생들도 있다”고 했다.

◇동호인 늘어난 세 가지 이유

업계에선 동호인 급증 이유로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초·중·고 원격 수업이다. PC용 시뮬레이터는 게임성도 가지고 있는데, 집에 있는 시간이 크게 늘어난 학생들이 게임 삼아 시뮬레이터를 접한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둘째는 1980년대 초반 PC용 시뮬레이터 시장을 개척했던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사가 작년 8월 14년 만에 신규 프로그램을 발매했기 때문이다. 신상품이 신규 고객을 끌어내는 소위 ‘신상 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MS의 신규 프로그램은 DVD로 22만장이 넘는 용량의 위성사진 데이터로 전 세계 지형을 실물처럼 재현하고, VR(가상현실) 기기를 지원하는 등 각종 최신 IT기술을 적용했다. 이 시리즈를 통해 하는 ‘랜선 여행’도 유행이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박모(39)씨는 이 타이틀을 이용해 얼마 전부터 남편과 미국 네바다주를 경비행기로 일주하고 있다. 박씨는 “코로나 때문에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컴퓨터 화면으로나마 대리 만족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Flight simulator 2020'의 플레이 장면. 경비행기로 이탈리아 베네치아 위를 날고 있다.

세번째는 코로나로 조종사들이 유입됐기 때문이다. 동남아의 항공사 기장인 A씨는 “실제 비행을 거의 못 하는 상황에서 비행감 유지 등을 위해 예전에 종종 했던 시뮬레이션을 다시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며 “최근에는 재능기부 삼아 시뮬레이션과 유튜브 등을 이용해 후배 조종사나 일반인들에게 비행 지식도 알려주고 있다”고 했다.

◇실제 관제사·조종사 되는 경우도

물론 이런 PC용 시뮬레이터는 진짜 비행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일부 동호인들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다. 항공기의 실제 매뉴얼을 구해 읽기도 하고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만든 항공영어구술능력시험(EPTA)을 치기도 한다. 집에 각종 조종장치들을 놓고 ‘홈콕핏(Home cockpit)’이라고 불리는 조종석을 꾸미기도 한다.

보잉 737 제트여객기의 조종석을 모방해 가정집에 설치한 '홈콧핏(home cockpit)'. /JetMax

실제 관제사나 조종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가상 항공 관제 네트워크인 밧심의 경우 한국 지부에 총 76명의 가상 관제사가 있는데, 이들 중 5~6명은 실제 관제사다. 시뮬레이션을 위한 가상 관제를 하다가 진짜 관제사가 됐다고 한다. 에어부산 고성혁(49) 기장은 “대학시절 PC용 시뮬레이터를 접한 뒤 관심이 생겨 이후 실제로 조종사가 됐다”며 “주변 젊은 조종사 중에도 시뮬레이터 애호가였다가 진로를 조종사로 바꾼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