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릴이라는 원숭이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금시초문이라고요? 그렇다면 디즈니 만화·영화·뮤지컬로 만들어진 ‘라이온킹’의 첫 장면을 기억하시는지요? 선명하게 빨갛고 파란 얼굴색에 눈처럼 흰 구레나룻을 한 원숭이 도사 ‘라피키’가 아기사자 심바를 축복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죠. 네. 바로 그 원숭이가 맨드릴입니다. 지상에는 없을 것 같은 총천연색 얼굴을 한 진기한 외모의 원숭이, 라이온킹 덕분에 인지도가 급상승하기도 했습니다. 라이온킹의 라피키는 망자의 영혼과 교감하는 주술사이면서 정글의 법도를 꿰뚫고 있는 전능한 현자로 나옵니다. 실제의 맨드릴은 어떨까요. 오늘은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에 실제 맨드릴 가족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현실 속 맨드릴의 삶은 ‘라이온킹' 못지 않게 극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 전연령대 관람가인 라이온킹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이 펼쳐집니다. 왜냐하면 장소만 동물원일뿐 그들에겐 야생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공원의 7살 수컷 맨드릴 '라비'가 우람한 덩치를 뽐내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서울대공원

지난 1월 27일. 일곱살 난 수컷 맨드릴 ‘라비’가 중상을 입고 응급진료센터로 후송됐습니다. 목과 입 주변에 날카롭게 베인 듯 여러 군데의 상처가 났습니다. ‘라비’는 서울대공원에 살고 있는 원숭이 중에서도 우람한 덩치와 넘치는 파워, 터프한 성깔로 이름났습니다. 이런 라비에게 이처럼 치명적 상처를 입힐 만한 적수는 단 하나입니다. 또 하나의 수컷이자 라비의 친부(親父)인 열 네 살 ‘차트’입니다. 이날 둘의 물리적 충돌은 단순한 세력 다툼이 아니었습니다. 임양묵 사육사는 “차트의 친아들 라비가 건장한 수컷으로 자라나면서 둘의 관계는 이제 혈육의 정을 나눈 부자가 아닌 패권을 다투는 라이벌로 보인다. 야생에서는 원래 성장하면 가족의 개념이 희미해진다”고 말합니다. 의료진의 지극정성 치료를 받고 라비는 말끔하게 완쾌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재차 충돌할 가능성을 우려해 일단은 격리수용돼 ‘숙려기간’을 거친 뒤 합사될 예정입니다.

수컷 대 수컷으로 맞붙은 두 맨드릴의 투쟁의 소용돌이 복판에는 바로 올해 여덟살난 암컷 ‘라미'가 있습니다. ‘차트’의 친딸이면서 ‘라비’의 친누나입니다. 동물로 태어난 존재에게 ‘인륜 (人倫 )’을 적용하는 것은 인간의 시선일 뿐입니다. 맨드릴 가족이 원래부터 단촐한 세 식구는 아니었습니다. 지난 2012년 체코의 동물원에서 맨드릴 세 마리가 서울대공원에 새 식구로 합류했습니다. 수컷 차트와 암컷 맨디·쿠키였습니다. 맨드릴은 야생에서 대장 수컷을 중심으로 50~200마리 규모의 무리를 이룹니다. 이런 특성을 감안해 ‘차트'가 두 마리 암컷과 모두 사랑을 나누며 자손을 번식할 가능성도 있겠다고 동물원측은 생각했죠.

라이온킹의 원숭이 주술사 캐릭터 '라피키'와 실제 모델이 된 맨드릴. 사진속 맨드릴은 서울대공원의 수컷 '라비'이다. /월트디즈니파크 블로그. 서울대공원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차트는 맨디와는 뜨겁게 사랑했고, 마침내 이듬해 3월 예쁜 암컷을, 다음해 5월에는 듬직한 수컷을 출산했습니다. 아프리카가 원산지 못지 않게 비슷하게 서식 환경이 갖춰진 국내 동물원에서 번식에 성공한 쾌거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라미·라비 남매입니다. 그러나 ‘차트’는 또 한 마리의 암컷인 ‘쿠키’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냉담한 모습만 보였습니다. 결국 맨드릴 무리는 차트·맨디 부부와 슬하 라미·라비로 이뤄진 가족, 외톨이 ‘쿠키’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남매 네마리로 이뤄진 가족의 단란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2015년 10월 맨디가 자궁 부근 염증 악화로 숨을 거뒀거든요. 이렇게 되면 맨디와 비슷한 연배의 ‘쿠키’가 자연스럽게 가족의 빈자리를 대신할 법도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차트는 쿠키를 끝까지 박대하고 식구로 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독수공방하던 쿠키도 작년 종양으로 10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차트와 라미·라비 남매로 이뤄진 가족은 동물원 사육사들과 의료진을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남매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서울대공원의 맨드릴 수컷 차트(오른쪽)와 라비(왼쪽) 부자. 덩치가 비등해진 두 녀석은 혈연이면서 패권을 다투는 라이벌이다. /서울대공원

맨드릴 남매의 건강한 발육과 성장은 동물원의 기쁨이었지만 한편에서는 고민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성장한 암수 동물들이 한 공간에 있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죠 . 본능을 제어할만한 사람만큼의 이성을 동물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죠. 실제 그런 예후가 관측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2018 년 어느 봄날 , 혹시 모를 근친을 미리 예방하고자 긴급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피부 이식형 피임제로 유명한 ‘임플라논’을 시술한 것입니다. 콩알보다 더 작은 이식물을 피부 깊숙이 삽입하면 발정 징후를 보이지 않게 되고, 따라서 수컷을 흥분시키거나 자극시킬 가능성도 뚝 떨어집니다. 만의 하나 짝짓기를 했다고 해도 임신이 되지 않도록 호르몬이 작동합니다. 근친혼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열등한 개체가 나올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주는 것이지요. 합스부르크 증후군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유럽의 대표적인 왕가인 합스부르크 집안에서는 과거 고귀한 혈통을 이어간다는 이유로 일부러 근친혼을 장려하다보니 턱이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오거나 각종 질병을 앓는 등 각종 유전 질환을 앓으며 태어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죠. 맨드릴을 비롯한 동물들이 본능에 충실하도록 둘 경우 언젠가는 동물판 합스부르크 증후군이 터질 수도 있으니까요.

라비의 식사 모습. 평소에는 과실과 채소를 먹지만 종종 우족 등 고기도 먹는다. /서울대공원

임플라논은 효과를 톡톡히 봤습니다. 차트는 다시 근엄한 아버지이자 무리의 리더의 모습으로 라미를 돌봤습니다. 문제는 라비였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자라고 , 불쑥 불쑥 기운이 솟는 그가 친누나 라미를 위협하거나 힘을 과시하는 일이 이따금씩 벌어졌습니다. 위에서 몸을 누르며 힘을 과시하는 모습은 얼핏 교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라미는 기겁해서 도망갔습니다. 1월 27일에 발생한 두 수컷의 충돌도 라미에게 접근하려는 라비를 차트가 제어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임양묵 사육사는 “한 배에서 나온 남매지간인데도 차트는 라미를 보듬어야 할 딸로 인식하고 있지만, 아들 라비에 대해서는 ‘내 딸에게 못된 마음을 품은 녀석’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장성한 수컷은 독립해 자기만의 세력권을 꾸리는 야생의 맨드릴 본성이 발현된 것으로 동물원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야생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죠.

부자관계이면서 동시에 덩치도 힘도 대등한 수컷 라이벌 관계인 차트와 라비는 ‘집안 분위기’를 살펴 합사 여부가 결정될 예정입니다. 세 가족이 한 지붕 위에서 재회하기 전에 또 하나의 조치도 취해질 예정입니다. 3년전 라미에게 이식된 임플라논의 ‘약발’이 곧 다 될 예정이어서 새 임플라논 시술을 앞두고 있습니다. 맨드릴 가족의 경우처럼 임플라논은 발정주기가 사람과 가까운 원숭이 무리들(영장류)이 ‘선’을 넘는 일이 없도록 제어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공원에서 태어난 라미(아래)와 라비(맨 위) 남매. 라미는 혹여나 있을 근친번식을 막기 위해 임플라논 시술을 받은 상태다. /서울대공원

맨드릴이 속한 개코원숭이류는 영장류 중에서도 거친 기질과 터프함으로 유명합니다. 맨드릴의 사촌뻘인 개코원숭이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직접 영양이나 새를 사냥해 먹는 ‘맹수본능’도 타고났습니다. 이런 종족 본능을 유지시켜주기 위해 동물원에서도 특정 기간에 우족 등 쇠고기를 공급해주며 야성을 유지시키도록 돕습니다. 언젠가 만나게 될 배우자와 2세 번식을 위한 ‘몸만들기’의 일환인 셈이죠. 푸른 빛과 붉은 빛이 감도는 얼굴을 한 맨드릴이 하품을 하고 기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는 장면은 서울대공원 동물원의 ‘명장면’중 하나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모쪼록 단출한 맨드릴 가족이 어서 빨리 배우자들을 만나 우월한 유전자를 대물림하며 번창했으면 좋겠습니다.

◇조선일보는 매일 아침 재테크, 부동산, IT, 스타트업, 의학, 법, 책, 사진, 영어 학습, 종교, 영화, 꽃, 동물, 중국, 영국, 군사 문제 등 21가지 주제에 대한 뉴스레터를 이메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구독을 원하시면 <여기>를 클릭하시거나, 조선닷컴으로 접속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