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원순) 빈소에 조문을 가지 않았다. 인권 변호사와 시민운동가 시절의 고인을 존경했고 소소한 인연도 있었지만 차마 갈 수가 없었다. 피해 여성을 향한 야만적인 2차 가해의 광경들, 비판에 귀를 닫고 ‘서울특별시장(葬)’을 택한 결정, 성추행 의혹을 물으니 ‘후레자식’이라고 퍼붓는 여당 대표의 언행 때문이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애도를 할 기회를 박탈해간 사람이 누구인지 묻고 싶었다.”
1990년대부터 방송과 신문, 인터넷 등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1세대 정치평론가 유창선씨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인물과사상사)를 펴냈다. 진보운동을 했고 민주당이 야당이던 시절 그곳에서 정당 활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이 책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 조국·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등 현 정부의 집권 세력을 강하게 비판했다.
‘박원순을 조문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유창선씨는 “여성운동가들마저 피해여성을 외면했다”며 이렇게 썼다. “평소 ‘약자에 대한 배려’니 ‘양성평등’이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들까지 2차 가해를 방조하거나 그 대열에 동참했다. 심지어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런 기막힌 SNS 글에 수천 명씩 ‘좋아요’를 누르는 광경은 어느 미개한 나라가 아닌,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화였다. 고질적인 정파성과 진영 논리가 숨어 있었다. 그러니 애도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문재인 정부는 ‘착한 권력’이라고?
유창선씨는 서문에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진보 진영의 승리를 위해 말을 하고 글을 썼다”면서 “이제는 오랫동안 내가 속했던 진영의 논리와 모습을 비판하게 되었다. 나도 변했고, 그들도 변했다”고 밝혔다. 그는 세상을 바꾸려는 진영의 일원이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방송에서 배제되는 수난을 겪었다. 촛불 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서도 그 진영의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 다시 배제되었다. 저쪽의 민낯도 보고 이쪽의 민낯도 본 셈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래도 ‘착한 권력’인데, 왜 야당을 비판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권력을 비판한다는 것이 야당에 문제가 없다는 의미는 전혀 아닐 것이다. 다만 한국 정치의 과거에 대한 책임을 보수 야당에 물었다면, 적어도 오늘에 대한 책임은 현재의 집권 세력에 묻는 것이 균형 있는 태도라고 믿는다. 더구나 현재의 집권 세력은 대통령, 행정부, 국회, 지자체, 지방의회 등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권력이 아니던가.”
이 책의 부제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극단과 광기의 정치’. 표지를 넘기면 볼테르의 문장이 적혀 있다. “모든 광신자는 똑같은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다.” 목차는 1부 ‘문재인 시대의 극단과 광기’로 열려 2부 ‘정치의 두 얼굴’, 3부 ‘조국과 추미애의 늪에 빠지다’, 4부 ‘진영의 정치, 분열의 나라’를 거쳐 5부 ’7080년대생의 정치를 기다린다'로 닫힌다. 이 책에 담긴 저자의 견해 몇 가지를 소개한다.
◇'토착왜구'라는 낙인찍기
무슨 일만 있으면 적폐 취급을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는 악마이고 내가 속한 진영은 천사이다. ‘토착왜구’라는 용어는 그런 악마 만들기에 사용된 언어의 흉기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아무에게나 토착왜구의 낙인을 찍는 것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진보적인 인사들을 걸핏하면 빨갱이라고 낙인찍고 탄압했던 수법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지금 2021년을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사는 것도 아닌데, 자생적인 친일파가 있다면 얼마나 있겠는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책임 있는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여전한 숙제지만, 엉뚱하게도 추미애에게 사퇴하라고 했더니 토착왜구라고 하는 것은 의사 표현의 입을 막으려는 비열한 수법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선악 이분법이 더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586세대가 중심인 집권 세력이 갖고 있는 도덕적 우월의식 때문이다. 586세대는 독재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을 하며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 문제는 그 자부심이 오만과 독선, ‘내로남불’로 변질됐다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는 언제나 선하다’는 착각에 빠져, 진영 내 누군가의 문제가 드러나도 그 잘못은 쉽게 이해되고 정당화된다.
◇권력은 왜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나
정경심 교수에 대한 1심 실형 선고가 나온 뒤, 음식평론가 황교익은 “골고다 언덕길을 조국과 그의 가족이 걸어가고 있다. 십자가를 짊어졌다. 예수의 길이다”라고 말했다. 조국이 검찰을 개혁하려다 박해를 받아야 했던 순교자였다는 이야기다. 법원은 11개의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고 조국은 “가시밭길을 가겠다”며 항소했다. 법원이 571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통해 조목조목 지적한 거짓 주장들에 대한 사과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예수가 언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가 박해받는 피해자라는 서사는 여당 정치인들에 의해 이어진다. 지지자들은 판결문에 나온 구체적인 사실에는 입을 닫고 변함없는 믿음만을 표현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유난히도 집권 세력은 자신들이 피해자인 것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언제나 보수 야당과 보수 언론과 검찰에 의해 공격받는 약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아직도 독재정권에 모진 탄압을 받는 민주투사들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집권 세력이 어떻게 약자일 수 있겠는가? 사실과는 거리가 먼 ‘피해자 코스프레’일 뿐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는 투기꾼들 때문이지 잘못된 정책 때문이 아니란다. ‘피해자 코스프레’는 우리는 떳떳하다는 보상심리를 낳고, 자지자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며, 그들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거둔다.
◇나라가 아수라장인데 침묵하는 대통령
대통령이 보이지 않는다. 2020년 1월 신년 기자회견을 했던 문재인이 다시 기자회견을 한 것은 1년이 지난 2021년 1월이었다. 추미애가 윤석열의 직무 정지와 징계 청구 조치를 발표해 온 나라가 떠들썩해진 날, 청와대 강민석 대변인은 이런 문자 브리핑을 했다. “문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 발표 직전에 관련 보고를 받았다. 그에 대해 별도의 언급이 없었다.” 눈을 의심케 하는 내용이었다. 나라가 아수라장인데 대통령이 수수방관하며 침묵하는 모습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조국 사태 때도 문재인은 그랬다. 결국 조국이 사퇴하고 나서야 조국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는 말을 남겼다. 자기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빚’은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대통령이 어째서 국민을 향해서는 그런 빚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추미애와 윤석열의 대립이 1년 가까이 계속되는 동안 문재인은 무책임하고 비겁했다. 추미애의 조치를 문재인이 재가했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부만 모르는 부동산 정책 실패의 원인
문재인 정부 들어 25번의 부동산 대책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정부가 집값을 잡으려고 대책을 발표하고 나면 오히려 집값이 크게 오르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가까운 예로 임대차 3법이 야당과의 협의 없이 시행되자 시장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우려했던 대로 전세는 씨가 말랐다. LH의 부채를 키워 전세 공급 물량을 확보하고 호텔 객실을 전세로 내놓겠다는 ‘바보들의 행진’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정부가 집값을 잡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잡고 있는 셈이다.
부동산 정책이 뒤죽박죽이 된 것은 부동산으로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출발점은 서울 강남 집값 잡기였다. 그러다 보니 풍선 효과로 인해 집값 상승은 수도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모든 인프라가 잘 갖춰진 강남 지역의 특성을 감안하면, 그곳의 집값은 시장 원리에 따라 정해지도록 놔두는 것이 낫다. 대신 전체 국민의 주거 안정에 주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다주택자는 물론 유주택자까지 죄인 취급하며 징벌적 규제를 했고, 약자들을 위해 내놓는 정책이 번번이 약자들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유시민은 지식인인가, 선동가인가?
유시민이 사과해야 할 것이 노무현재단 계좌 열람 의혹 하나일까? 검찰이 정경심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기 사흘 전 정경심은 자산관리인과 함께 동양대에 가서 연구실 컴퓨터를 챙겨갔고, 자택에 있던 하드디스크 3개도 빼돌렸다. 증거 은닉 논란이 일었지만 유시민은 기상천외한 발언을 한다. ‘알릴레오’를 통해 “증거를 지키기 위한 거지. (검찰이) 장난을 칠 경우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증거 보존’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그 주장은 1심 판결을 통해 터무니없음이 확인되었다.
유시민은 ‘어용 지식인’도 아니고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는 선동가였다. 내가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은 어째서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노무현재단 유튜브를 통해 조국과 정경심 부부를 수호하는 성전을 치렀느냐는 점이다. 설마 ‘조국 수호’가 노무현 정신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노무현은 세상을 떠나며 “마을 주변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를 따랐던 사람들은 노무현을 말하며, 자신들을 위해 세상 곳곳에 너무도 많은 것을 세우고 있다. 이 광경을 보았다면, 노무현은 과연 뭐라고 말할까?
◇20대에게 민주화 세대는 무엇일까?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린 대표적인 사람이 20대들이다. 20대는 3040세대와 함께 문재인 당선을 이끌었다. 그런데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보수적 성향이 강한 60대 이상과 마찬가지로 지지율이 20%대로 하락했다. 불공정 시비가 누적되면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이들의 반감 또한 쌓여온 것이다. 조국 사태부터 박원순의 죽음, 추미애와 윤석열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기성세대는 모든 것을 진영 논리에 따라 판단했다. 그러자 20대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어째서 같은 편이라고 해서 자기들끼리 그토록 감싸주고 있는가?
민주화 세대가 20대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싸움은 결국 자신들의 자랑스런 과거를 인정해달라는 ‘인정투쟁’이다. 그들은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대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의 평판이나 업적이 아니라, 오늘 그가 저지른 잘못이다. 조국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준 불공정 행위’를 했고, 박원순은 ‘서울시장이라는 권력에 의한 성추행'을 했을 뿐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