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덕수궁길 초입에 있는 ‘마이시크릿덴’. 낮에는 책을 읽는 공간으로, 밤에는 와인바로 운영 중인 이곳에는 주방이 없다. 대신 주변 맛집에서 배달앱으로 직접 주문하면, 입구에서 받아 그릇에 담아 자리에 가져다준다.
메뉴에 적힌 건 이 집이 파는 와인과 잘 어울릴 만한 맛집 메뉴. 김재윤 마이시크릿덴 대표는 “레드 와인에는 광장시장 박가네 빈대떡의 육회 김밥과 맷돌 빈대떡, 화이트와인에는 따봉이네 매콤짜장라볶이와 튀김, 내추럴와인에는 신불떡볶이 숙대점의 로제베이컨 떡볶이와 흑미치즈볼이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고객들이 낼 비용은 1인당 음식 주문 비용 3000원, 와인을 주문하지 않고 직접 들고 온다면 병당 4만원의 콜키지만 내면 된다. 낮에도 1인당 공간 이용료 1만5000원(평일 3시간, 주말 2시간)만 낸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음식이 아닌 공간을 판매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외부 음식 반입 금지’가 아닌, ‘자신의 음식과 술을 가져오세요(BYO·Bring Your Own)’다.
가게 주인 입장에서는 주52시간 근무제와 실업급여 등으로 늘어난 인건비와 인력난, 시설비를 줄일 수 있다. 고객 입장에서는 코로나 사태로 프렌치 파인다이닝부터 평양냉면 맛집까지 배달 가능한 세상, 내가 좋아하는 술과 음식을 분위기 좋은 공간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서울 성동구에 있는 ‘와인문화공간 성수’도 한 테이블당 5000원만 내면 배달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 예쁘게 차려 놓고 먹고 싶다면 1인당 1000원의 식기와 접시 이용료만 내면 된다. 와인도 병당 1만5000원만 내면 반입 가능하다.
강창훈 와인문화공간 성수 대표는 “홈 파티처럼 와인과 육·해·공 음식을 다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때 동네 바 손님들이 옆에 있는 빵집과 정육점에서 빵과 햄을 사 와서 즐기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이 방법으로 고정비용과 인력 리스크 문제도 줄였다.
“식당은 셰프 채용 비용이 많이 들어요. 손맛 좋다고 소문나면 이탈도 많이 하고요. 음식 보조 직원들은 구하기도 어렵고, 구한다고 해도 실업급여 때문에 쉽게 그만두곤 하죠. 주52시간 때문에 인건비도 많이 들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주방은 가볍게 가져가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렇게 공간을 판매하는 배달 가능 식당이 많아지면서 주변 상권을 키우는 상생(相生)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모델을 처음 유행시킨 것으로 알려진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고래바’는 주변 자양전통시장 상권을 살렸다는 평을 받는다.
공간 이용료 1인당 5500원만 내면, 하우스 와인 한 잔이 제공되고, 배달 음식 주문과 와인 반입이 가능하다. 정보람 고래바 대표는 “대중에게 와인이 조금 더 친근하고 접근 가능하길 원했다. ‘이 와인은 꼭 이 음식을 먹어야 해’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와인과 음식을 자유롭게 페어링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원했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황학동에 있는 ‘술술 317’은 아예 서울 황학동 중앙시장 한복판에 있다. 술은 주문하고, 안주는 시장에서 사 들고 가거나 배달시켜 먹는다. 중앙시장 맛집인 ‘옥경이네 건생선’의 갑오징어구이와 시장 어묵을 이 공간에서 와인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와인도 매장에서 1병을 주문하면, 1병당 1만원을 내고 가져갈 수 있다.
최근 한남동에 새로 생긴 와인바 ‘튤립’은 메뉴판에 아예 주변 맛집 메뉴들이 적혀 있다.
들기름 막국수는 ‘고메공방’에서, 카레와 포카치아는 ‘지니김밥’, 떡볶이는 ‘떡볶이 프로’, 리코타 치즈샐러드는 ‘비스트로 수방 J’, 치즈와 샤퀴테리 플레이트는 ‘동남방앗간’에서 만든 제품이다. 튤립에 앉아 인근 다섯 맛집의 대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