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호 기자

적막이 흐르는 무대. 종소리, 시계 소리가 들리더니 뿌연 연기 사이로 중요 부위만 가린 남성 배우가 나타난다. 몸 위에 걸친 옷감 한 장만 더 사라지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같은 모습. 배우는 아무 말 없이 머슬 경연 참가자처럼 팔과 다리와 몸통의 자세를 바꿔가며 육체미를 뽐낸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남자의 빛나는 육체가 빚어내는 동작만으로도 무대는 몽환적일 수 있었다.

오는 2월 13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테바’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와일드 와일드 판타스틱 나이트메어’의 시작 부분이다. 이 공연을 보려면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여자일 것, 그리고 19세 이상일 것. 남자는 출입 금지다.

와일드 와일드

이 공연의 연출자는 걸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나르샤(40·박효진). 걸그룹 시절 ‘성인돌’로 불렸고, 솔로 데뷔 후에도 ‘삐리빠빠’ 등의 뮤직비디오에서 아슬아슬한 모습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이번에는 남성 배우들만 출연하는 여성 전용 뮤지컬의 연출가로 변신한 것. 지난달 4일 공연장에서 만난 그는 “아무리 정숙한 여자라도 꿈에선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표현하잖아요. 은밀하고 일탈하는 또 다른 나, 그 꿈을 표현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공연장 ‘테바’는 무대와 객석이 가깝다. 배우들은 관객들이 앉아 있는 객석을 자유롭게 오간다. 배우와 관객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은 마치 클럽 같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클럽 ‘베르크하인(Berghain)’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관객들이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이국적인 느낌을 받게 하고 싶었죠.”

/와일드 와일드

대사나 스토리도 거의 없다. 대신 폴 댄스, 난타, 패션쇼 등 다양한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절정에 달할수록 배우들의 연기 난도는 올라간다. 줄에 매달려 공중에서 공연하기도 하고, 폴을 이용한 춤을 선보이기도 한다. 마치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성인 쇼를 보는 느낌. 관객이 무대에 올라 배우와 함께 줄에 매달리는 코너에선, 너도나도 선택을 받으려 손을 들고 자신을 어필한다.

“초반기 관객들은 배우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당황했어요. 그런데 회차가 거듭할수록 ‘여긴 손 드는 사람이 위너(승리자)’라는 소문이 돌았나봐요. 요즘은 다들 한번 무대에 올라 배우들과 함께 매달리려고 작정하고 오는 것 같아요.(웃음).”

흥행을 위해 선정성을 극대화한 것은 아닐까. 나르샤는 “선정적인 것이 무조건 상업적이라면, 모든 선정적 콘텐츠는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는 공식이 성립된다”면서 부인했다. 그는 “선정성과 상관없이 ‘꿈에서의 일탈’이라는 우리 쇼의 주제를 이해하는 관객이 많아야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서 “한 편의 ‘예술적인 쇼 같다’고 평가해주는 분이 많아 큰 힘이 된다”고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성적 판타지는 무엇인가. 걸그룹‘브라운아이드걸스’나르샤가 연출한 여자들을 위한 공연‘와일드 와일드 판타스틱 나이트메어’에서 남자 배우들은 상체를 드러낸 채 난타 공연을 하고 공중에 매달려 춤추는 등 다양한 육체의 변주를 보여준다. /w2company

여자 연출가가 만든 여자들을 위한 공연, 만약 반대로 만들어졌다면 사회적 분위기가 어땠을까.

“그렇게 (남녀) 편을 나누고 싶지 않아요. 이런 공연이 탄생한 건 이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저는 여자니깐 제가 남자들을 위한 공연을 연출할 수는 없겠지요?”

가수에서 연출가로 처음 변신한 그는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도 했다.

“배우들의 숨소리 하나까지 체크해야 하더라고요. 가수는 본인에게 주어진 3~4분만 집중해서 그림을 만들어 내면 되는데 연출은 그 외 모든 걸 다 해야 하니까요.”

나르샤는 “공연을 어떤 쇼라고 규정하지 말고 하나의 판타지쇼로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친구들끼리 온 관객들이, 그다음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와요. 그럼 어머니가 더 좋아하세요. 어머니도 여자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