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걸렸다.”

1586년 여름. 국무상인 프랜시스 월싱엄의 책상위에 편지 한 장이 놓였습니다. 18년 전 스코틀랜드 왕좌에서 쫓겨나 영국에 도망와 있던 메리 스튜어트가 안토니 바빙톤이라는 사람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앞서 바빙톤이 먼저 메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서신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바빙톤은 동료 13명과 함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할 것이며, 계획이 성공하면 메리가 여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리는 답장에서 계획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외국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역모는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 스파이를 심어놓고 있는 월싱엄이 모든 움직임을 처음부터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호시탐탐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를 노렸던 메리는 이번만은 살아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메리는 그 동안 여러번 반란과 역모에 관련됐고 그때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넘어가곤 했는데,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해 10월 말 귀족과 고문관, 판사들로 이뤄진 특별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여왕 살해 교사’ 혐의를 적용, 메리의 처형을 요구했습니다. 몇 달 동안 사형 집행장 서명을 미루던 여왕이 결국 월싱엄 등의 설득으로 이듬해 2월 1일 서명을 하게 됩니다. 메리는 7일 후 마지막 거처였던 포더링헤이 성의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바빙톤 음모 사건’은 여왕과 잉글랜드에겐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여왕은 지난 20년간 자신의 왕위를 노렸던 정적을 마침내 제거했고, 왕권은 더욱 탄탄해졌습니다. 하지만 메리의 처형은 가톨릭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양국 갈등은 군사적 격돌로 빠져들게 됩니다.

◇메리 스튜어트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재위 1485~1509)는 앙숙 관계인 스코틀랜드와 평화를 위해 맏딸 마가렛을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마가렛은 헨리 8세(1509~1547)의 두 살 위 누나였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큰 고모였습니다. 그 마가렛의 아들(제임스 5세)이 낳은 딸이 메리 스튜어트입니다. 촌수로 따지면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는 5촌지간입니다. 아홉살 많은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에겐 아줌마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메리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최대의 위험 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왼쪽)과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메리는 만 16세 때 프랑스 왕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재위 1년 반도 안돼 사망하자 곧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5세 때부터 프랑스에서 살았던 젊고 매력적인 여왕은 곧 여러 남성과 사랑을 나눴습니다. 우선 헨리 7세의 외증손자이자 자신의 사촌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복잡한 치정에 얽히게 되고 단리 경은 메리의 정부(情夫) 보스웰 백 제임스 헵번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후 메리는 보스웰 백과 결혼을 했는데, 그녀의 도를 넘는 애정행각에 분노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메리를 폐위하고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는 복위를 꿈꾸며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1568년 가까스로 잉글랜드로 도망쳐 엘리자베스 1세의 보호 아래 살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왕권은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에게 넘겨졌습니다.

불행은 메리가 엘리자베스 1세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언젠가는 자신이 그 왕좌에 않고 말겠다는 야심을 품은 데서 시작됐습니다. 사실 메리의 주장이 완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메리가 헨리 7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 문제는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 계승 자격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봤듯이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은 잠깐 헨리 8세의 둘째 부인이 됐고 왕비 자리에 올랐지만 곧 폐위되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가톨릭 진영에서는 애초부터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고 해도 앤 불린이 나중에 폐위가 됐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왕권을 계승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메리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리가 잉글랜드로 망명을 해 오자, 국내 가톨릭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위협은 메리의 망명 이듬해인 1569년 일어난 ‘백작들의 반란’이었습니다. 일부 귀족들이 잉글랜드 최고의 귀족이자 유일한 공작인 노퍼크 공과 메리를 결혼시킨 뒤, 엘리자베스 1세를 축출하고 메리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잉글랜드를 가톨릭의 나라로 만들려 했지요. 모의가 들통이 나자 거사를 도모했던 노섬벌런드 백과 웨스트모얼런드 백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왕의 군대에 참패한 뒤 스코틀랜드로 도망쳤습니다.

다음해에는 교황이 반란을 선동했습니다. 교황 피우스 5세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에 처하고 폐위를 선언하는 교서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가톨릭 세력이 준동을 했지요. 런던에 있던 피렌체 은행가 로베르토 리돌피가 다시 노퍼크 공과 메리의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때를 맞춰 국내 가톨릭 세력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에스파냐 군이 침공해 엘리자베스 1세를 몰아낸다는 시나리오도 마련했습니다. 교황과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지지를 받은 이 계획도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의회는 메리의 처형을 주장했지만 여왕이 승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퍼크 공을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한 동안 잠잠했던 역모 움직임은 10여년 후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1583년 국제적인 음모가 적발됐습니다. 그해 11월 메리와 긴밀히 연락하던 가톨릭 교도 스록모턴이 검거됐는데,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계획을 실토했습니다. 그는 이 반란 계획이 메리의 아이디어로 시작됐으며, 잉글랜드 주재 에스파냐 대사인 베르나르디노 데 멘도사 등이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국내에서 가톨릭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에스파냐가 군대를 파병해 돕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목표는 물론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고 메리를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지요. 이 역모 역시 사전에 발각돼 에스파냐 대사가 국외로 추방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왕은 메리의 사형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586년 또 다시 메리가 관련된 역모가 발각됐고, 메리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운이 좋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여왕을 노렸던 상대가 능력과 자질이 부족했던 걸까요. 그보단 엘리자베스 1세가 나라를 운영하는 능력, 그 중에서도 적재적소에 능력있는 인재를 등용해 그들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도록 한 용병술이 뛰어났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뒤엔 첩보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랜시스 월싱엄이 있었습니다.

◇프랜시스 월싱엄

월싱엄은 키가 작고 얼굴이 검었다고 합니다. 여왕은 그를 ‘무어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왕보다 한 살 많은 월싱엄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였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에 다니기도 했던 그는 강경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1553~1558)가 왕이 되자 잉글랜드를 떠나 스위스와 프랑스 등을 전전했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가 왕이 되자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이후 정계에 입문해 승승장구 출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가운데)과 윌리엄 세실(왼쪽), 프랜시스 월싱엄(오른쪽)

1572년 8월 발생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그에게 가톨릭은 절대 공존을 허락해서는 안될 세력이라는 믿음을 각인시켰습니다. 예수의 12사도 중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 축일을 계기로 로마 가톨릭 교회 추종자들이 프랑스의 칼뱅교도, 즉 위그노에 대한 학살극을 벌였는데, 약 3개월 동안 희생된 사람이 3만~7만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월싱엄은 프랑스 주재 잉글랜드 대사로 근무했는데, 가톨릭이 개신교에 얼마나 적대적인지, 가톨릭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1559년 콘월 지역에서 처음 하원의원이 된 그는 프랑스에서 귀국한 다음해인 1573년 국무상에 올랐습니다. 이후 1590년 사망할 때까지 여왕을 보필하게 됩니다. 이 기간 엘리자베스 1세의 모든 국정에 그가 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외 무역과 식민지 개척 지원, 드레이크의 세계일주 지원, 네덜란드 신교 세력 지원, 여왕과 외국 왕·귀족과의 결혼 협상, 에스파냐 무적함대와의 격돌 등. 여왕은 때론 월싱엄의 직설적인 조언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편지에 “저 무어인은 자신의 피부색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월싱엄은 여왕이 싫은 기색을 보여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면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월싱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임무가 바로 ‘여왕 지키기’였습니다.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여왕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지요. 그는 국고 비자금을 들여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모아 비밀첩보망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그의 정보원들은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유럽과 지중해까지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암호 해독가까지 고용했다고 합니다.

그가 절대 눈을 떼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사람이 바로 메리였습니다. 월싱엄은 “먼저 하나임의 영광을, 그리고 다음엔 여왕의 안전을 희망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악마 같은 여인 메리가 살아 있는 한” 여왕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월싱엄은 메리가 주고받는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 내용을 모두 파악한 뒤 전달했습니다. 메리가 암호로 적은 편지들은 메리와 월싱엄 양쪽에서 돈을 받은 양조업자가 맥주통 속에 몰래 숨겨 밖으로 전달하곤 했는데, 양조업자는 그 밀서를 월싱엄의 첩보원에게 넘기는 식이었습니다. 메리에게 전달되는 편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왕에게 월싱엄이라는 신하가 있었다는 것이 메리에겐 운명적 불행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월싱엄은 국무상이 된 이후 14년 동안 집요하게 매달린 끝에 결국 메리의 참수를 이끌어냈습니다.

영국의 근대를 열었던 튜더 왕조 때 등장한 월싱엄의 조직은 현대 첩보 조직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20세기 이후 가장 인기있는 첩보물 중 하나인 ‘007 시리즈’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는 영국의 해외 정보 전담 정보기관인 ‘Mi6′ 소속인데 이 MI6의 뿌리가 바로 월싱엄의 첩보 조직이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월싱엄의 좌우명은 오늘날에도 나라를 이끄는 분들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워하는 편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덜 위험하다.”

◇정적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여왕이 영국에 남긴 족적은 크고 선명합니다. 에스파냐와의 대결로 유럽의 변방 섬나라였던 잉글랜드는 이제 누구도 무시 못할 강국 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아직 제국으로 성장하려면 먼 길을 가야하지만 말입니다.

16세기 잉글랜드 사회를 묘사한 그림

국내적으로도 질적 변화와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 중 하나는 구빈법입니다. 구빈법은 아버지 헨리 8세 때 처음 만들어졌지만 그 동안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엔클로저 등의 확산과 자본의 성장, 빈부격차의 확대, 인플레이션, 1590년대의 극심한 기근 등 사회 문제가 불거지자 여왕은 치세 말기인 1597년 구빈법을 새로 제정했습니다. 이전까지 빈민 구제는 교회가 맡아왔는데 앞으로는 국가가 이를 책임진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각 교구에 책임자를 임명해 빈민들에게 주거와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 재원 마련을 위해 구빈세를 도입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때 제정된 구빈법은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250여년간 영국 빈민 정책의 골격이 됐습니다.

언니 메리 1세 때 가톨릭으로 되돌아갔던 잉글랜드 교회를 개신교 쪽으로 돌려놓은 것도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즉위하자마자 첫 의회에서 수장법을 다시 제정했습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제정했지만 언니 때 폐지했던 그 법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잉글랜드 모든 교회에 적용하는 새 기도서를 만들었고, 1563년 개최된 성직자 회의에서는 39개조 신앙조항을 채택했는데, 칼뱅교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이 신앙조항은 1571년 성공회의 교리로 제정되었습니다. 이 교리는 오늘날까지 영국 교회의 기본 교리로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유산으로 왕위 계승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녀로 살다 죽은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습니다. 여왕의 사후, 잉글랜드의 왕권은 당시 스코틀랜드 왕인 제임스 6세가 물려받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를 죽이고 자신이 왕에 오르려 끝없이 시도했던 여왕의 일생일대 숙적 메리의 아들입니다.

왕위 계승에는 국무상인 로버트 세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세실은 제임스 6세에게 접근, 엘리자베스 1세의 비위를 잘 맞춰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이 전략은 적중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제임스 6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에 대해 역사학자 존 어니스트 니얼은 “베일에 가려진 문구지만, 여왕은 그들에게 도저히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 없도록 자신의 바람을 제임스에게 표현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엘리자베스 1세가 제임스 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뜻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1603년 여왕은 눈을 감았고,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 명의 왕이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 나라의 완전 통합은 제임스 1세의 증손녀인 앤 여왕 때 완성됩니다. 1707년 그레이트 브리튼 통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의 탄생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마지막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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