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한 명작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워너브러더스에서 만든 명랑만화시리즈 ‘루니 툰(Looney Tunes)’일 것입니다. 1980년대 한국 TV에서는 ‘만화동산’이라는 좀 무성의한 제목으로 저녁시간 안방극장을 찾았죠. 이후 그 후속편인 타이니 툰(Tiny Toon Adventure)’이 ‘말괄량이 뱁스’라는 이름으로 역시 안방극장을 찾았고, 이후 마이클 조던이 출연한 ‘스페이스 잼’이라는 실사 복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더니 작년에는 무려 사반세기만에 르브론 제임스가 나온 속편 ‘스페이스 잼:새로운 시대’가 개봉했습니다. 꾀돌이 토끼 벅스 버니, 심술꾸러기 민폐대마왕 검정오리 대피 덕, 귀엽게 생겼지만 하는 짓은 잔혹스럽기 짝이 없는 노란 수컷 카나리아 트위티 등 주연 캐릭터들도 유명하지만,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조연들의 인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신스틸러’ 중 하나가 바로 로드러너(roadrunner)입니다. 대사는 그저 ‘빕빕’라는 의성어 딱 하나입니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달립니다. 두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요. 항상 코요테와 짝을 이뤄 등장하죠. 코요테의 목적은 오로지 로드러너를 잡아먹는 것.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쫓고 또 쫓지만, 과학의 법칙을 모두 무시하고 종횡무진 초초초음속의 속도를 누비는 로드러너를 당해내지 못하고 연방 골탕만 먹습니다. 대개 루니툰 에피소드가 그렇듯 이 큰줄기를 유지한채 디테일만 바뀐채 다양한 변주가 만들어져왔죠. 코요테가 드디어 로드러너 사냥에 성공하는 날 막을 내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날래고 영리하며 지혜도 갖췄지만, 기본적으로 피식자로 그려지는 이 로드러너의 실제 모습은 충격적 반전을 선사합니다.
새해에 소개해드리는 첫 주인공은 로드러너의 실제 모델인 길달리기새입니다. 음흉함과 사악함의 상징으로 인류에게 오랫동안 각인되온 뱀. 그래서 뱀을 사냥해서 먹는 짐승들은 용맹의 상징으로 각인돼왔습니다. 먹히지 않으려는 뱀과 먹으려는 사냥꾼과의 대결은 동물의 왕국의 오랜 서사중 하나죠. 대표적인 사례가 몽구스와 코브라의 대결이죠. 이 못지 않은 서사가 또 있습니다. 바로 길달리기새와 방울뱀의 대결입니다. 만화 속에서는 코요테를 피해서 잽싸게 도망가며 약을 올리며 약자 승리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던 이 새가 알고보니까 맹금류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냉혹한 사냥꾼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사냥대상이 바로 뱀, 그것도 코브라와 함께 양대 독사로 꼽히는 방울뱀이라는 것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우선 길달리기가 방울뱀을 사냥하는 동영상(Josef Viet Vet, Nat Geo Wild-SaidRehman Af ) 장면을 보실까요?
숨이 막힐 듯한 승부입니다. 방울뱀은 꼬리를 흔들며 특유의 위협적 제스처를 취하지만, 길달리기새의 눈빛은 이미 ‘넌 잠시후 내 위장속에 들어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그 날카로운 눈매를 부라리면서 방울뱀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탐색전을 합니다. 그리고 양측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선공을 날립니다. 한 번 물리면 승부는 바로 죽음을 동반한 참패로 끝날 수 있지만, 길달리기새는 놀랄정도로 경쾌한 속도로 방울뱀의 독니를 피해갑니다. 그리고 길쭉한 부리를 뻗어서 뱀의 턱을 잡는데 성공합니다. 이 순간, 승부의 축은 완전히 기울어졌습니다. 길달리기새가 대대손손 종족의 DNA로 전승해온 필살기를 펼치기위한 완벽한 조건이 갖춰졌거든요. 바로 ‘패대기’입니다. 부리의 양턱으로 꼭 움켜쥔 뱀의 턱을 온힘을 다해서 땅바닥을 향해서 내리꽂습니다.
그냥 내리꽂는게 아닙니다. 우선 고개를 하늘로 치켜올렸다가 바닥을 향하면서 가속과 가중을 극대화합니다. 타격지점도 편편한 땅이 아니라 날카로운 자갈 모서리입니다. 누가 새를 새대가리라고 했습니까. 그 말은 적어도 길달리기새에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이 새가 대단한 사냥꾼인점은, 발톱이나 부리의 원초적 힘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기술과 타이밍을 접목시킨 한 차원 다른 전투력을 선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독수리·매·올빼미·부엉이 같은 공인된 맹금류보다도 월등한 측면이 있습니다. 패대기는 서너번이면 족합니다. 사막의 제왕을 자처하던 방울뱀은 두개골이 으깨졌고, 존재감을 과시하던 꼬리 끝의 방울소리도 잠잠해집니다. 한 때 생쥐와 개구리, 작은 도마뱀을 꿀떡꿀떡 삼켰던 방울뱀, 그러나 오늘은 자신이 먹거리가 돼 길달리기새의 입속으로 처연하게 사라집니다.
괜히 길달리기새라는 이름이 붙은게 아니에요. 건조한 미국과 멕시코의 사막지대에 주로 사는데 나는 것보다 달리는게 더 익숙한 새랍니다. 실제로 달리는 속도는 시속 최대 24㎞. 땅에 터를 잡고 달리는 새치고는 빠르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코요테를 뿌리칠만큼 빛의 속도로 달린다고는 할 수 없죠.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방울뱀을 위시한 도마뱀 등 파충류입니다. 이것들이 보이지 않을 때 곤충을 먹고, 정말 먹을게 없으면 나무열매 등으로 배를 채웁니다. 비자발적 잡식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눈에 띄는 것은 길달리기새의 족보입니다. 뻐꾸기목(두견이목) 뻐꾸기과입니다. 그렇습니다. 몰염치와 철면피의 대명사 뻐꾸기 패밀리의 일원이죠. 애먼 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서 그 집 자식을 모조리 절멸시킨 뒤 가련한 어미새로 하여금 독박육아를 쓰게 하는 탁란으로 악명높은 새들이죠. 뻐꾸기과의 많은 새들이 이런 탁란으로 대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길달리기새는 이들과 한통속으로 여겨지는 것이 무척 억울할 듯 합니다. 뻐꾸기류 중에서는 아주 드물게 직접 둥지를 짓고 새끼를 키우거든요. 지구촌에 사는 열 세 종의 길달리기중에 고작 세 종만이 뻐꾸기집안 특유의 탁란습성을 갖고 있다고 하네요. 대개 한 배에 세개에서 여섯개의 알을 낳고 암수가 정성들여 새끼를 돌봅니다.
이 족속이 ‘탁란안하는 뻐꾸기’임을 보여주는 동영상입니다. 작은 도마뱀이 통째로 물려있는데,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을 보면, 바닥에 통째로 패대기치는 특유의 사냥법에 의해 이미 혼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식사거리를 어떻게 분배할지 부모새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먹성 좋은 새끼 한 마리가 냅다 받아서 꾸역꾸역 삼키는군요. 파충류에 탐닉하는 습성은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