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정신과 너무 섬세한 감성이 요동친, 괴로운 인생 아니었을까.”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천도교 대교당. 일본 문예지 ‘중앙공론(中央公論)’의 미야타 마리에 전 편집장이 추도사를 읊자 곳곳에서 눈물을 훔쳤다. 김지하(1941~2022) 시인의 영정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날 이곳에선 오후 3시부터 약 6시간 동안 ‘김지하 시인 49재 추모제’가 열렸다. 미야타씨를 비롯한 김 시인의 문화예술계 지인, 그의 시를 읽었던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김 시인의 유족은 참석하지 않았다.
황석영, 윤정모, 문정희 등 문인은 물론, 화가 임옥상,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유인태 전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 등 다양한 분야 인사들이 함께했다. 특히 배우 최불암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1960년 4·19 직후 국내 각 대학 연극부 학생들의 연합 모임 ‘새생활계몽대’에서 김 시인을 만났고, 오랜 우정을 이어왔다고 한다.
미야타 전 편집장은 1970년대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 김지하 시인의 절창을 일본에 전하고, 당시 투옥 생활을 반복하던 김 시인 구명운동을 일본 내외에서 펼쳤던 지한파. 그는 추도사에서 시인과 함께 종묘에서 우연히 만났던 인물을 기억해냈다. 다정하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냐고 묻자 “서대문 교도소 간수야, 많이 맞았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이상하지만 상냥한 면모가 민주화 투쟁을 움직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지하 시인에게 등 돌렸던 민주화 운동권 출신들의 ‘화해’ 발언도 이어졌다. 김 시인은 1960~7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인물이지만, 1990년대 운동권의 연이은 극단적 선택에 대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며 본지 칼럼을 통해 비판한 바 있다.
이번 추모제 추진위원장을 맡은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행사 개최 이유를 “지난 5월 8일 (김지하의) 원주 빈소가 (김 시인의 생전 행보 때문에) 썰렁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슬펐다”고 설명했다. 김사인 시인은 “심술궂고 미운 데도 적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릇이 크니 소리도 컸겠지요”라고 쓴 추모시를 낭송했다.
작가 황석영은 “미디어와 출판사들은 뭔가 얻어가려고 끊임없이 그(김지하 시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말과 현실은 어긋나고는 했다”며 “김지하는 아픈 사람이고, 그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여러 번 말하곤 했다”고 말했다.
김지하 시인에게 비판받았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전언도 있었다. 김 시인은 2012년 백 교수와 그의 평론을 ‘쑥부쟁이’ ‘깡통’ 등으로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 이날 사회를 맡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이후 둘이 화해한 건 아니고 ‘김지하 선생은 병중이라 몸과 마음이 고통받고 있다’며 백 선생의 이해가 있었을 뿐”이라며 “백 선생은 ‘김지하의 문학사상은 한국 문학사의 큰 자산’이란 말을 전했다”고 했다.